NY NY | 뉴욕에서 만난 사람들 - Tom and Pip

2017. 3. 7. 16:25글/New York, New York

톰은 바클레이 은행의 중역이었고, 네 명의 아이들을 키우는 아빠였다. 매 주 수요일 아침 7시, 나는 엄청난 출근 인파를 뚫고 그랜드센트럴 앞 작은 카페에 가서 톰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가 한국어를 배우는 이유는 입양한 네 명의 한국 아이들 때문이었다. 십 년 후, 온 가족이 한국을 여행할 계획인데, 그 때 한국어로 음식을 주문할 것이라는 야심을 갖고 있었다.

톰과 그 아내 핍은 신실한 카톨릭 신자였고, 늦은 결혼을 하자마자 입양을 택했다. 처음엔 한 명이었지만, 그 아이가 외로울까봐 한 명을 더 입양하고, 또 딸이 있었으면 좋겠어서 한 명을 더 입양하고... 그러다가 네 명이나 입양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핍은 유엔을 그만 두고 육아에 전념하였다.

우리는 카푸치노와 크로와상으로 아침을 먹으면서 한 시간 동안 한국어를 공부했는데, 그는 한 번도 내가 아침 값을 내도록 한 적이 없었고 아르바이트 비용도 넉넉히 주었다. 나는 그 카페에서 카푸치노와 버터와 딸기잼과 크로와상이 정말 어떤 맛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마치 이태원의 외국인이 콩나물국밥으로 해장하는 맛을 알게 되는 것과 비슷한 과정이었을 것이다.  

내가 한국으로 돌아온 후 몇 년이 흘러 우리의 연락은 끊겼다. 그런데, 2015년 초여름, 그로부터 이메일이 도착했다. 정말 그의 여섯 식구가 한국에 오게 된 것이다. 아들 앤드류와 딸 테레사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는데, 대학을 진학하는 딸이 집을 떠나기 전, 한국에 다 함께 오는 여행이었다. 물론, 그 개구쟁이 동생들도 함께 올 것이다. 나는 흥분했다. 아이들이 얼마나 자랐을지도 궁금했고, 무엇보다도 톰과 핍을 다시 보게 될 일이 벅차도록 기뻤다. 한국인 고아 네 명의 인생을 거두어 준 그들의 희생에 대하여, 한국인으로서 나 역시도 진심으로 감사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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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에서 만난 그들은 전형적인 미국 중산층의, 검소하고 촌스럽고 착하고 어리버리하고 밝은 모습이었다. 그들의 여행 계획은 아이들을 발견한 장소들을 순방하는 것이었다: 인천, 포항, 부산, 대구. 그래서 서울에 머무는 주말은 내가 가이드 역할을 자처했고, 주 중에는 엄마와 이모들이 대신 뛰어 주셨다. 맛있는 것을 사주고, 북촌 한옥 마을도 데려가고, 남산 타워도 올라가고... 떠들썩하고 정신 없는 서울 일정이 끝난 뒤, 그들은 포항을 필두로 자기들끼리의 전국 투어를 시작했다. KTX 표를 끊어주고 역에 가까운 호텔을 잡아주면서, 나는 혹시 그들이 길을 잃거나 사기를 당할까봐 노심초사했지만, 동시에 왠지 하나님께서 그 사랑스런 가족들을 보호해 주시리란 믿음도 들었다.  

드디어 마지막 날 밤, 그들은 인천공항에 가까운 호텔로 무사히 돌아왔다. 전화기 너머 경쾌한 목소리가 울렸다, "우리 살아남았어요!" 이제 다음 날 아침이면 미국으로 돌아갈 것이다. 나는 마지막 작별인사를 직접 하고 싶어서, 직장을 마치고 차를 몰아 공항 고속도로를 달려갔다. 아이들은 저마다 자신이 겪은 모험에 대하여 즐겁게 떠들었다. 부산에서 살아있는 낙지가 식탁에 올라온 것을 보고 경악했던 일, 대구에서 호텔을 잘못 찾아갔을 때 우스웠던 일... 그리고나서, 그들은 나에게  아름다운 옥상과 야경을 보여주고 싶어했다. 아빠는 지름길로 먼저 가고 아이들은 각자 뛰어갈 때, 나는 얌전히 엄마의 곁을 지키며 걸어갔다. 그 때 그녀가 애정을 담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테레사는 잘 알고 있어요, 다른 아이들보다도... (She has awareness...) 그 애는 잠잠히 이 모든 일들을 받아들이고 있지요.”

그것은 나에게 이 7박 8일이라는 짧고도 긴 여행, 그 웃고 떠들고 정신 없던 시간을 아울러 주는 마법의  순간이었다. 나는 그녀의 한 마디로 이 여행의 무게와 깊이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여행은 그들에게 즐거움과 휴식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아이들에게는 고통스러운 일이었고 괴로운 발걸음이었다. 핍이 말을 이었다, “테레사는 너무나 순수하여 (innocent)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 지 잘 이해하지 못해요. 어떻게 한 젊은 여인에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는지. 한 편 앤드류에게는 분노 (anxiety)가 남아있어요.” 이 때 아이들이 우리들 앞으로 다가왔다. 아마도 끝없이 이어졌을 그들의 이야기는, 그렇게 핍의 미소로 마무리 되었다.

한국에서의 마지막 밤, 아이들은 호텔 옥상의 아름다운 정원에서 뉴저지에 있는 자기 집 정원의 꽃과 같은 종류를 발견하여 반가워하며 마지막 산책을 하고 있었다. 나는 이 네 명의 아이들이 무엇을 먹어야 할 지, 입어야 할 지 어디에 머물러야 할 지 알 수조차 없는 갓난아기의 때, 먹을 것과 입을 것과 머물 곳, 무엇보다도 삶과 사랑을 준 이 두 부부에게 몹시 감사하였다. 단순히 물질적인 기반을 주었을 뿐 아니라, 엄마 아빠로서, 이 아이들의 마음을 깊이 헤아리고 살펴서, 고국 - 낯설고 서운한 땅의 한 발 걸음, 그 한 걸음을 내딛도록 손 잡아주는 진정한 부모의 모습에 눈물이 글썽여지도록 감사하였다.



(Photo by Nicolai Bernstein @ unsplash.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