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엄마의 정원(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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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정원 | 건망증
월요일 아침엔 늘 전 날의 성경공부를 올리고 주말 동안 밀린 집안 일을 하는데, 언제나 엄마가 전화를 하신다. "뭐하니?" 대개는 점심을 함께 먹자는 요청이신데, 애시당초의 용건과는 상관 없이 주말의 간략한 업데이트와 상황보고는 필수 과정이다. 그리고 늘 따라오는 엄마의 반응, "근데, 내가 왜 전화했지?" 그럼 나도 도우려 애쓴다, "엄마, 어떤 카테고리였어요? 먹는거? 교회? 아빠?" 그럼 엄마는 막 웃으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 이름을 부르는 동안 왜 전화했는지 잊어버렸어." 그럼, 나도 막 우습다. 예전에 - 그러니까 내가 훨씬 더 어리고 나의 뇌가 젊었을 때에는 엄마의 이러한 습관적인 건망증이 두려웠다. 왜 인간의 뇌는 이렇게 연약한걸까. 이러다가 치매에 걸리면 어떡하나. 그러나 지금은 나도..
2018.10.15 -
엄마의 정원 | 호박
내가 아프단 사실을 알자마자 엄마는 계속 음식을 보내기 시작하셨다. 아플 땐 고기를 먹어야 한다며 소고기 미역국을 냄비 채 통째로 보내셨고, 야채, 생선조림, 표고버섯전, 김치찜, 곤드레나물밥, 배, 오렌지, 매실액기스 등을 끊임 없이 갖다주셨다. 너무 달고 큰 무가 하나에 1900원 밖에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감격하셔서, 밤 새 깍두기를 담으시고 나와 며느리와 이모들과 할머니께 나르시느라 온 몸이 아프다 하시면서도. 오늘 아침도 찬란한 햇빛이 거실에 쏟아지는데, 어제 저녁 엄마가 갓 지어 갖다주신 찰진 흑미밥을 한 그릇 데워서 천천히 음미하며 먹었다. 아침 햇살처럼 당연한 엄마의 사랑... 이 사랑 없이 나는 어떻게 살 수 있을까. 주의 성실하심이 크도소이다... 주의 말씀 없이 나는 어떻게 살 수 있..
2017.10.20 -
아줌마
남편의 바램으로 시작했던 20대 청년 구역장이었지만, 실제 청년들을 만났을 때는 너무 사랑스러워서 나 스스로도 놀랐었다. 수 십 년 전이었다면 엄마 뻘이었을 나는 아이들을 존댓말로 대했다. 진심으로 존대해주고 싶었기 때문이었고, 한 편으로는 소중했기 때문이었다. 신문을 장식하는 그 이상한 젊은 아이들은 다 어디 있는 걸까. 모두 반듯하고 예의바르고 아름답고 대견했다. 교회에 오는 아이들이기 때문에 착한걸까. 물론 시간 관념이나 약속에 대한 책임감은 덜하다고 들어서 알고 있었는데, 그것도 곧 아이들이 나를 어려워하는 부분이 크기 때문이란 것을 느꼈다. 나만 몰랐었는데, 나는 그들에게 '어른'이었다. 구역 식구들 중 한 청년이 우리 집을 단편영화의 로케이션으로 사용할 수 있는지 부탁해왔다. 5분짜리 과제였기..
2017.03.31 -
희귀암. 수선화.
희귀암 말기. 어머니를 간호하는 친구는 날로 초췌하여 가지만, 그의 두 어린 딸은 이 수선화처럼, 봄처럼, 병원 복도에서도 환하게 빛났다. 꽃을 좋아하시던, 내 친구의 어머니께 위로가 될까 하여 들고 간 수선화였지만, 내규 상 병실로 가져가지 못하여 어쩔 수 없이 우리 집 창가에 잠시 머물게 되었는데, 밤 사이 이렇게 꽃망울이 터졌다. 외롭고 고된 전투를 치르는, 친구의 어머니 손을 잡고, 부풀어오른 배를 잡고, 눈물 흘리며 기도해주던 남편이 정말 고마웠다. 어머니 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가는 길, 연약하고 덧 없는 우리 모두가 결국 마주하게 될 그 죽음의 순간에도, 주님 - 친구 나자로의 무덤 앞에서 포효하시던, 십자가 위에서 죽음과 싸우셨던, 나의 주님께서 함께 해 주실 것을 믿어서, 나는 병색 완..
2017.03.20 -
엄마의 정원 | 고구마 3
엄마가 주신 고구마는 1년생 화초이다. 이모부와 아빠를 거쳐 내게 오기까지 30년의 세월을 견딘 낡은 스피커 위에서 자신의 노년을 화려하게 꽃피우고 있다. 처음 고구마가 싹을 틔웠을 때, 이렇게 많은 햇빛과 그늘을 거느린, 아름다운 모습으로 자라나리라 예상하지 못하고, 다만 햇살을 마음껏 쬐라고 높은 스피커 위에 올려두었을 뿐이었다. 아침 저녁으로 물을 채워주어도 금새 바닥을 드러내던, 혈기왕성하던 시기도 있었는데, 이제는 이틀에 한 번 물을 갈아주어도 괜찮아서 서운하다. 낙엽도 많이 떼어준다. 고구마의 본체도 물렁해지고 있다. 나는 바야흐로 고구마의 노년을 각오해야할 것 같다. 정말 시들은 모습을 블로그에 올릴 수 있을까... 자신은 없어서, 아직은 매일 아름다운 초록의 모습을 찍는다. 사실 나는 매일..
2017.02.01 -
엄마의 정원 | 가을도 떠나고 있다 (엄마는 여행중)
뉴질랜드의 큰이모가 무작정 비행기 티켓을 보내주셔서 황급히 떠난 엄마의 해외 여행. 엄마는 집안 곳곳 "난방을 끄라" 와 같은 메모를 붙여두시거나, 간장게장이나 홍시 등의 저장식품을 남겨두셨지만, 아빠의 외로움은 다른 여느 때보다도 짙어 보인다. 우리 집 살림과 아빠 집 살림, 둘 사이에서 고민하던 나는 공평하고 속편하게 모두 안 하기로 했다. 하루 한 번 저녁 식사만 챙겨드리는데, 그것도 아빠가 퇴근 때 외식을 하시거나 우리 부부와 함께 저녁을 드실 수도 있기 때문에 가장 간소 버전으로 준비한다. 그래서, 매일 한 번 마실가는 기분으로 아빠 집을 향해 산책하던 길, 익어있는 가을 열매가 너무 예뻐서 찰칵. 어쩌면 이렇게 미세먼지 가득한 하늘 아래 이토록 선명하게 붉은 과실을 맺는 걸까. 이 붉은 색이 ..
2016.11.23 -
엄마의 정원 | 미니 김장
결국, 엄마가 강화도에 가신게 문제였다. 평화롭던 수요일 오후, 엄마로부터 전화벨이 울렸다. 구역식구들과 강화도 풍물시장에 다녀오신다길래, 순무김치를 부탁드렸는데, 엄마는 나보고 수레를 갖고 지하주차장에 내려오라는 것이다. 도대체 얼마나 사셨을까. 호기심으로 내려가보니, 정말 수레가 필요하다. "한 상자에 만원인데 안 살 수가 없었어." 고구마, 무, 파, 무청, 콩, 고추 순무김치 등등 싱싱한 야채들을 한 아름 실어 오셨다. 졸지에 미니 김장을 하게됐다. 그러나 파를 다듬으시는 엄마를 뒤로하고 나는 선약되어있던 장소로 떠나야만했다. 그 날 엄마는 자정까지 야채들을 다듬으셨다고 한다. 그래서 아침 일찍 엄마네 집으로 갔을 때, 거실은 김장모드였다: 바닥은 신문지로 무장되어있었고, 집의 모든 대야들은 출동..
2016.11.07 -
엄마의 정원 | 도라지
아빠가 5년 전 할머니 산소에 성묘가셔서 캐오신 야생 도라지가 엄마의 11층 아파트 창가에서도 계속 그 황홀한 보라빛 꽃을 피우고 있다. 밖으로 나가고 싶어하는 개구쟁이 꼬마가 코를 창에 박고 바깥 세상을 동경하듯이, 꽃도 그 여린 얼굴을 유리창에 박고있다. 창 밖은 오직 외곽순환도로이고 자동차들이고 미세먼지일 뿐인데도. 그녀가 살던 그 깊은 숲 속, 비밀스런 햇살과 바람이 찾아오던 그 곳의 흙을 그리워하듯이.
2016.11.03 -
엄마의 정원 | 고구마 2
엄마가 그저 물에 담가두셨을 뿐인데, 엄마가 하신 일은 그것밖에 없는 것 같은데, 고구마가 식탁을 점령해버렸다. 모두가 잠든 밤에 토토로가 몰래 와서 고구마에게 마법을 건 것일까. 자신이 라푼젤인듯 그 잎사귀를 치렁치렁 늘어뜨리고 마법같은 생명력을 뽐내는 중이다. 엄마의 손길과 눈길 아래에서는 고구마 한 알도 행복해지나보다.
2016.11.02 -
엄마의 정원 | 고구마
엄마가 싹 튼 고구마를 물에 담가두신 지 며칠 되지 않아 사진처럼 무성해졌다. 엄마는 무엇이든 이렇게 키워내셨다: 우리 집이 아무리 어려운 시절을 지날 때도 엄마의 식탁은 언제나 마법처럼 풍요롭고 건강했으며 (그래서 사위를 단숨에 12kg이나 찌워내셨다), 엄마의 화단은 꽃들이 지지 않았고, 엄마 곁에는 늘 선물을 주고 받는 친구들이 끊이지 않는다. 심지어 생활비가 끊겨도 엄마의 지갑은 하나님께서 채워주셨다. 가끔 엄마는 아빠의 사업이 어려워 억울한 채근을 당하셨는데, 엄마의 눈물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다른 어느 때보다 신속했던 것 같다. 그래서 엄마에게는 조용하고 겸손하지만 확실한 "삶"에 대한 자신감과 "죽음"에 대한 자신감이 있다. 그 분의 딸인 나로서는 엄청난 복이다.
2016.1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