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성경공부 |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3) 20170319 마리아와 요셉

2017. 3. 20. 12:08성경 공부 /미술과함께-2017

수태고지, Fra Angelico, 1438~1450, Fresco 


중세시대 수태고지를 주제로 한 유명한 그림 중 하나인 안젤리코의 프레스코화는, 이 사건에 대하여 당시 사람들의 전형적인 이해를 보여줍니다. 천사는 공손하게 손을 모으고, 한 쪽 무릎을 꿇어 마치 기사가 귀부인에게 예를 갖추듯, 마리아에게 임신 소식을 알리고 있으며, 마리아 역시 겸손하게 손을 모으고 그의 경배에 맞절하고 있습니다. 이 신비로운 순간에 걸맞게 천사와 마리아의 머리에는 할로가 그려져있으며, 이탈리아다운 건물과 배경은 선원근법의 정석이고, 천사와 마리아의 표정은 평온하고 우아합니다. 프레스코화가 주는 색채의 고상함도 그 분위기에 한 몫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묘사하는 실제는 다릅니다. 현실에서의 성모 마리아는 십대 미혼모였고, 돌에 맞아죽기 직전이었습니다. 남편은 배신감에 상처받았고, 가족들 역시 수치와 경멸을 보냈을 것입니다. 결코 위의 그림처럼 고상하고 우아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천사가 실제 보였는지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올 해, 이재철 목사님의 세 번 째 구역장성경공부에서는, 천사가 그림처럼 실제 보이도록 나타난 것이 아니라 마리아의 마음 속에 깊은 울림으로, 이 구원의 끔찍한 소식을 전했을 것이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아마, 아래의 그림이 더 현실에 가까웠을 것입니다. 


The Annunciation, James C. Christensen


크리스텐슨의 그림에서 천사는 없습니다. 다만 어린 소녀가 홀로 결연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추론의 근거는 누가복음1장 28절, '그에게 "들어가" 이르되" 입니다. 많은 크리스챤들은 이 경험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내면에서 소리가 울리는데, 그 소리는 절대 나의 생각과 감정에서 비롯될 수 없는 내용의 소리입니다. 나의 마음과 머릿 속을 늘 떠돌고 있는 잡생각들과는 뚜렷이 구분됩니다. 이러한 경우, '멀더' (X-파일의 주인공, 추억의 미드^^) 같은 성향의 크리스챤들이라면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셨어." 그리고 '스컬리' (역시 X-파일의 주인공) 같은 크리스챤들은 이런 식으로 말하겠지요, "가상적으로 어떤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아." 


어느 쪽이었든 상관 없이, 마리아는 치열하게 생각합니다, "이러한 인사가 어찜인고" 그리고 당차게 묻습니다, "나는 사내를 알 지 못하니, 어떻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누가복음을 1장부터 읽은 사람이라면 이 질문에서 자신도 모르게 입을 손으로 가리게 될 지 모릅니다. 이와 똑같은 질문을 했던 사가랴는 그의 부인 엘리사벳의 임신 기간 내내 실어증에 시달려야 했으니까요. 그러나, 마리아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제사장 사가랴가 믿을 수 없어서 "어떻게 그런 일이!"라고 반응했다면, 지금 마리아 - 갈릴리 나자렛 (즉, 변방 중에서도 변방)의 가난한 십대 소녀-는 이미 천사의 말 속에 깊이 연루되어 함께 고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녀의 이 순수한 반응과 당찬 질문 덕분에, 이 위대한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절망에 마주칠 때마다, 저는 이 말씀을 얼마나 많이 되씹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저를 배신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 말씀에 인생을 던진 마리아는 (이재철 목사님의 wording으로는 "육체의 호흡을 의지하던 마리아가 죽고, 하나님의 호흡을 의지하게 되면서') 성모 마리아로 거듭났습니다. 이번 교안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천사가 일러준 대로, 마리아는 엘리사벳을 찾아갑니다. 그녀는 온 세상에서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이해해 줄 유일한 공동체였습니다. 우리에게는 신앙의 공동체가 절실합니다. 세상은 모르는, 이해할 수도 없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함께 공감하고 격려해야 할 공동체는, 모든 크리스챤들에게 필수적입니다. 공동체 없이 우리는, 하나님의 그 크고 기이하신 계획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 역시 위대한 선택을 했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드라마에서 애인의 변심이나 외도로 고뇌하는 남성들을 봅니다. 그러나 꿈의 계시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이후, 요셉은 최선을 다 하여 가장의 책임과 의무를 다 합니다. 여성으로서, 저는 이러한 남성들에게 깊은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마리아를 죽음의 위기에서 건져내어, 그녀의 흠결을 덮고 남편이 되어준 것도 감사한데,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책임져주고 보호해주고 생계를 보장해주면서, 아버지의 자리를 지켜주었습니다.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위해, 그는 심지어 이집트로 잠시 이민을 가기도 했었지요. 저는 오늘의 본문이 여성성과 남성성의 아름다움을 잘 대비시켜 보여준다고 생각하는데요, 여자들은 계시를 받으면... 친구에게 이야기하러 달려갑니다. (마치 마리아가 엘리사벳에게 달려가듯이) 남자들은... 묵묵히 일합니다. :-) 제가 여성성을 조금 희화화 했지만, 용서해 주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사실, 역사적으로 사람들이 성모 마리아를 편애해 왔음을 인정해야할 것 같습니다. 


이번 성경공부에서 저에게 가장 감동적이었던 본문은, 신명기의 순결법이었습니다. 


"남자가 유부녀와 통간함을 보거든 그 통간한 남자와 그 여자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처녀인 여자가 남자와 약혼한 후에 어떤 남자가 그를 성읍중에서 만나 통간하면 너희는 그들을 둘 다 성읍문으로 끌어내고 그들을 돌로 쳐 죽일 것이니 그 처녀는 성읍 중에 있어서도 소리지르지 아니하였음이요 그 남자는 그 이웃의 아내를 욕보였음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만일 남자가 어떤 약혼한 처녀를 들에서 만나서 강간하였거든 그 강간한 남자만 죽일 것이요 처녀에게는 아무 것도 행치 말것은 처녀에게는 죽일 죄가 없음이라 이 일은 사람이 일어나 그 이웃을 쳐 죽인 것과 일반이라 남자가 처녀를 들에서 만난 까닭에 그 약혼한 처녀가 소리질러도 구원할 자가 없었음이니라" (신명기 22장 22~27절) 


오늘도 저는, 뉴스와 신문과 인터넷 포털을 덮고있는, 괴로운 헤드라인들을 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지어주신 여성성과 남성성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잊어버린 것 같습니다. 너무 많은 남자들이 여성을 성의 대상으로 여기고, 너무 많은 여자들이 남성의 성을 이용합니다. 그러나, 지금보다 여성의 지위가 훨씬 낮았던, 기원전 1500년 경, 하나님께서는 이미 강간이 '살인'과 다름 없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성경은 요셉이 마리아를 아내로 데려온 이후에도 그녀가 예수를 낳을 때까지 관계를 갖지 않았다고 굳이 덧붙여줌으로써, 요셉이 성적으로도 그녀를 보호해 주었다는 힌트를 줍니다. 저는 이 묵묵한 남성성에 깊이 감사합니다. 저는 이러한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으며, 세상은 반드시 이 복음을 알아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남성이 여성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여성이 남성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하나님께서 처음에 그 둘을 어떻게 디자인하셨는지, 반드시 알려주고 위로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리아와 요셉, 이들의 죽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셨다고, 알려주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