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 복제 시대의 디자인

2016. 8. 9. 19:31글/나의사랑하는책


직장을 그만 두고, 이제 어떤 일을 해야할까 고민하던 나는, 블로그를 통해서 자신이 직접 만든 옷이나 인테리어 혹은 디자인 용품을 파는 사람들의 뉴스를 보며 생각했다 - 의류학과 서양화를 전공했으니, (비록 십 년도 전의 이야기지만)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그 전까지 카카오톡 외 트위터나 페이스북은 물론 싸이월드조차 하지 않았던 내가 소셜미디어라는 망망한 바다에 매일 소심한 눈길을 보내게 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마침 주변에 프로페셔널 디자이너 친구들이 있어서 약속을 정해 만났다. 그리고 그 날 바로 블로거가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지난 10년의 영업팀 업무는 나의 성격도 변화시켰다. 나는 모든 것들을 경제적인 가치로 환산하는데 익숙했다. 친구들 앞에서 나는 긍정적인 (가벼운) 핑크빛 (아마츄어의) 안목을 부끄러움 없이 신나게 나열하고 있었다. 웹사이트를 통해 적은 자본금으로 시작하여 정기적인 수입을 가져다 줄 아이템들을 꿈꾸고 있었다.

 

그러나 전문가인 친구들은 경험에서 비롯된 현실적인 안목으로 나를 다독여 주었다. 좋은 디자인 제품은 대기업의 박리다매를 이겨낼 수 없다. 작은 업체가 좋은 디자인 제품을 생산할 지라도, 오히려 대기업에서 그 아이디어를 더 좋은 디자인으로 다듬은 후 4분의 1 가격으로 생산하여 유통경로를 장악하는데 경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중소 규모의 디자인 업체들도 경쟁이 치열하여, 이미지 복제의 문제는 어찌 할 수 없다고도 했다. 예를 들어, 나의 한 친구는 정성을 들여 디자인을 개발했지만, 그 아이디어를 복제한 다른 회사가 이제는 육아에 전념하게 된 자신보다 더 크게 사업을 일으키는 모습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문득어린 왕자가 지구에 도착하여 장미꽃밭을 보고 울음을 터뜨리던 장면이 떠올랐다그가 사랑했던도도하고 아름다웠던 꽃은 온 우주에 단 한 송이가 아니었던 것이다너무 많은 이미지와 너무 많은 디자인이 범람한다나에게 와서 비로소 꽃이 되었던 그 의미는 너무 쉬운 방법으로 흔해진다

 

이 때, 어떤 전략을 세워야 이 현실을 타개하여 먹고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도 세상 살기 조금이나마 편한 쪽에 속할 수 있었을 것 같다. 그러나 어느새 미술사를 전공한 나의 머리 속에는 발터 벤야민 (Walter Benjamin)기계복제 시대의 예술작품 (Das Kunstwerk im Zeitalter seiner technischen Reproduzierbarkeit)이라는 매력적인 아티클이 한 구절 한 구절 되살아나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천재 철학자는 카메라의 발명을 통해 앞으로 다가올 기계복제의 시대가 인류 문명과 생태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 지를 빠르게 감지했었다. 그가 나찌를 피해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 어딘가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때, 아마도 그는 2016년의 뜨거운 여름 극동의 한 반도국가에서 블로그를 통해 생계를 해결하고 싶었던 한 여자가 그의 글을 떠올리며 인생의 방향을 바꿀 만큼, 자신의 혜안이 몇 세대를 관통하여 인류에게 영감과 빛을 주었다는 사실도 모르는 채, 절망을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다행이도 어린 왕자의 곁에는 여우가 있었다여우는 실망하여 슬픔에 잠긴 어린 왕자에게 차근차근 사랑과 아름다움의 비밀을 설명해 주었었다한 송이의 꽃이 왜 소중한지. 왜 그 아름다움에 책임감을 가져야 하는지. 마찬가지로, 기계복제 시대에서 디자인의 아우라를 가치 매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현실에 순응해버리는 나의 모습을 본 친구의 위로는 부드러웠다, 진정성 있는 블로거들도 있어요. 그들의 시간이나 감성은 대기업도 쉽게 흉내낼 수 없지요. 사람들은 진짜를 알아봐요. 나의 다정한 친구는 훌륭한 디자이너이다. 이제 만 세 살을 넘기는 아들이 조금만 더 크면 다시 사업에 뛰어들 것이고, 다시 그녀의 아름다운 안목과 해석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선사할 것이다.

 

그 날 저녁, 남편은, 내가 블로깅을 통한 사업에도 소질이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더 확인시켜 주었다. 계산이 빠르고 현실적인 그는 언제나 붕 떠서 날아다니는 나를 지상에 안착시켜주는 사람이다. 언젠가 내가 매크로비오틱 전문가가 되겠다고 했을 때에도, 꽃을 유통하는 사업을 하겠다고 했을 때에도, 그는 이렇게 말렸었다, 돈 벌 필요 없어요. 당신이 제일 잘 하고, 제일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만 해요. 그의 어투가 다정했던 것은 아니었으나, 남편의 말은 언제나 감사하고 감동적이다. 온 세상은 내게 필요와 효용성을 요구하는데, 그는 나와 같은 평범한 여자를 사랑하여 그저 존재하기만 해도 된다고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내가 블로그를 하고싶어진 까닭은, 처음에 블로그를 시작하려 했던 이유와는 전혀 상관 없어졌다. 어쩌면, 나는 그 지혜로웠던 여우처럼, 다른 외롭고 치열한 어린 왕자들에게 왜 꽃이 아름답고 소중한지 설득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아둥바둥 몸부림치지 않아도 된다고, 당신은 그저 존재하기만 해도 귀하다고 격려할 수 있지 않을까. 

 

목숨을 위해 무엇을 먹을까 혹은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위해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목숨이 양식보다, 또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습니까? 하늘의 새를 보십시오. 씨를 뿌리지도 추수하지도 않을 뿐더러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먹여 주십니다. 그것들보다 여러분이 더 귀하지 않습니까? 들의 백합꽃이 어떻게 자라는지 살펴보십시오. 수고하지도 물레질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말하거니와,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그 가운데 하나만큼 차려입지 못했습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도 하느님이 이처럼 입히시거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십시오. 먼저 그분의 나라와 그 분의 의로움을 찾으십시오. 그러면 그런 것들도 다 곁들여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일 일은 내일이 스스로 걱정할 것입니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합니다. (마태복음 6 25~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