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랑하는 책 | 롤랑 바르트의 "카메라 루시다", 어머니를 향한 초혼

2016. 8. 12. 17:01글/나의사랑하는책


롤랑 바르트의 “카메라 루시다 (불어 원제로는 "La Chambre Claire" 밝은 방)”은 나에게 포스트모더니즘이나 후기구조주의, 혹은 사진이나 미학에 관한 책이기보다도, 깊은 슬픔에 잠긴 예민하고 고독한 철학자가 돌아가신 어머니를 부르는 초혼이다. 위의 사진은 원문인 불어를 영어로 번역한 Hill and Wang 출판사의 1981년 인쇄본이다. 한국에서는 이 영문 번역본의 제목을 따라 "카메라 루시다"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스투디움과 푼크툼’ 이야기는 너무 유명하지만, 동시에 이해하지 못했는데도 이해했다고 착각하기 쉬운 개념이기도 하다. 이 책 안에서 내게 가장 재밌었던 푼크톰의 예는 아래의 사진이었다.  


빅토리아 여왕이 승마를 하고 있다는 ‘정보’는, 롤랑 바르트에 의하면, 이 사진을 통해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스투디움’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푼크툼’은 무엇일까? 이 사진에서 바르트의 푼크툼은 위태롭게 말의 몸 전체를 덮고 있는 여왕의 ‘치마’였다. 만약 말이 무언가에 놀라 갑자기 뛰기라도 한다면…?! 마부와 여왕의 스캔들이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처음 이 사진을 보았을 때, 근엄하게 덮여있는 여왕의 긴 치마와 그 곁에 선 마부의 무뚝뚝한 표정을 보면서 나 역시, “당시엔 오랜 시간의 노출이 필요했을텐데…” 하며 조마조마하였다. 


"카메라 루시다"에는 재미있는 푼크툼이 가득하다. 그러나 내가 이 책을 사랑하여 아끼는 까닭은,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독신의 늙은 철학자가 돌아가신 어머니의 어린 시절 사진을 보며 울부짖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어머니의 죽음 후에 남겨진 사진에서 망자의 자취를 찾아 헤매다가 이 책을 쓰게 되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은 후 그의 사진을 본다는 것, 아니 사진 뿐 아니라 그가 남긴 물건들 - 그의 옷, 서랍, 구두 등을 보는 일에는 통증이 따르는 법이다. 


이 책의 13페이지 일부분을 좀 더 이해하기 쉽게 써보면 다음과 같다. 바르트는 사진 찍힐 때 자신이 느끼는 고충을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사진기 앞에서 나의 이미지가 ‘내가 생각하는 나’이기를 바란다. 동시에, 다른 사람들이 나를 ‘내가 생각하는 나’로 보아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알고 있는 나’로 렌즈에 비추어지며, 또한 그 이미지는 사진가가 자기 예술 작품의 ‘피사체로 여기는 나’이기도 하다. 이상하게도 어쩔 수 없이 나는 렌즈 앞에서 나인 척 연기하는 것을 멈출 수 없다. 나를 나로 여기게끔 해야 한다는 압력 때문에 사진기 앞에 서는 일은 내게 피할 수 없는 고문이고 악몽이며 가끔은 폭력이기도 하다. 그 이미지는 온전한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내가 의도한 바의 ‘내’가 사진 찍힐 때, 그렇게 재현된 나는, 아주 미묘하지만 진실을 말하자면, 주체도 아니고 피사체도 아니다. 엄밀히는 주체라고 느끼고 있는 피사체일까. 이 때 나는 죽음의 마이크로 버전을 경험한다. 


"사진 찍힌다는 것은 인화지에 박제되는 죽음이다." 철학자가 이렇게 말하는 까닭은, 그가 아무리 돌아가신 어머니의 사진들에서 그녀의 진정한 모습을 찾아 헤매어도 소용없이, 어머니 본연의 모습으로 인도해줄 푼크툼을 만나지 못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책의 말미에서 바르트는 그 바늘구멍과 마주친다. 어머니가 어린 시절 겨울 정원에서 찍은 사진에서 어머니를 발견한 것이다. 그 어린 소녀의 어색하게 마주잡은 손과 천진한 눈빛에서 바르트는 생 전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어머니의 어떠한 면모를 발견하고 울부짖는다.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본질을 찾아 헤매는 철학자에게 있어서 사진이란, 죽은 존재의 현실, 즉 그를 사랑해주었고 그가 사랑했던 존재의 필멸의 본질을 더욱 부각시켜주는, 바늘로 찌르는 통증이었다. 보인다는 것은 존재한다는 증거가 될 수 있는가. 우리가 보는 것은 과연 그것이 맞는가. 아직도 나는 老철학자가 사진을 대하는 진지한 태도와 존재를 찾는 아픔을 대할 때마다 경이롭고, 나를 둘러싼 모든 시각 정보들을 이렇게 꿰뚫어 보고싶다는 욕망을 느낀다. 사진이 비록 이 고독한 철학자에게는 텅 빈 죽음의 증거일 뿐이었지만, 나는 모든 사물과 현상이 가리키는 다른 실제가 있음을 믿는다. 그 푼크툼을 발견하고 그 바늘구멍 혹은 눈물샘을 통해 그 실체에 가 닿을 수 있기를 소망한다. 설사 내게 끝까지 재능이 없을지라도, 적어도 나는 이렇게 사물과 현상의 본질에 접근하여 고통과 땀으로 그것을 우리에게 전해주는 뛰어난 철학가들과 예술가들에게는, 세상이 경의를 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