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랑하는 책 | 한강의 "희랍어시간"

2016. 9. 13. 11:03글/나의사랑하는책

그 후 초등학교에 다니면서부터 그녀는 일기장 뒤쪽에 단어들을 적기 시작했다. 목적도, 맥락도 없이 그저 인상 깊다고 느낀 낱말들이었는데, 그중 그녀가 가장 아꼈던 것은 ‘숲’이었다. 옛날의 탑을 닮은 조형적인 글자였다. ‘ㅍ’은 기단, ‘ㅜ’는 탑신, ‘ㅅ’은 탑의 상단, ㅅ-ㅜ-ㅍ 이라고 발음할 때 먼저 입술이 오므라들고, 그 다음으로 바람이 천천히, 조심스럽게 새어나오는 느낌을 그녀는 좋아했다. 그리고는 닫히는 입술. 침묵으로 완성되는 말. 발음과 뜻, 형상이 모두 정적에 둘러싸인 그 단어에 이끌려 그녀는 썼다. 숲. 숲. 


한강 작가의 ‘희랍어시간’을 읽으며, 뉴욕 매니스음대에서 성악 과정을 밟던, 친한 언니가 해 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언니는 나의 발음을 분석하셨다. 


“너는 성대를 완전히 닫아서 소리를 울리지 않아. 언제나 공기가 약간 새어나오게 하지.” 

“성대 근육은 불수의근 아니에요?” 

“(나의 말에 미소지으며) 아마 너는 내성적이라, 네 목소리가 너 자신에게 너무 크게 울리는 것이 싫었을거야.” 


살짝 열어 공기가 새어나가게 하는 것. 나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성대 안이 너무 크게 울리지 않게 하는 것. 한강 작가님은 어떻게 이러한 예민한 (심지어 불수의근 같은 성대 근육의) 움직임을 포착해 내시는 걸까? 어렸을 적 읽었던 동화에서, 여자 주인공은 입만 열면 장미꽃과 보석이 흘러나오는 상을 받고, 그녀를 구박하던 새언니들은 두꺼비와 악취가 나오는 벌을 받는 이야기가 있었다. 과연 언제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 부끄럽지 않을 수 있을까.    


언니의 말에 나도 미소지었다. 동의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나의 목소리가 크게 들리는 것이 싫었다. 나의 모습이 다른 사람에게 드러나는 것도 싫었다. 그래서 언제나 사뿐히 걷고 조심스럽게 들어가고 될 수 있으면 공기처럼 되고싶었다. 한강작가님이 이 소설에서 너무나 예민하여 모든 소리에 조심스러워지는 여주인공을 묘사하실 때, 나의 어린 시절과 너무 닮아서 공감되었다. 나의 목소리는 지금도 허스키하지만, 이제는 다른 사람들의 눈과 귀와 목소리에 예민하지는 않다. 지금 이 글도 병원 대기 중 복도에서 많은 사람들의 시선에 별 어려움 없이 즐겁게 타이핑하는 중이다. 연골이 닳은 나의 낡은 무릎 위에 노트북을 올려두고. 


***


저녁에 무릎, 하고 

부르면 좋아진다. 


진정, 두 무릎을 수술 받고 누워서 김경주 시인의 시, <무릎의 문양>을 읽었을 때, 그러했다. 고단한 무릎을 수평으로 올려놓고, 입술로 ‘무릎’ 하고 부르면, 종일 중력을 저항하여 나의 온 몸을 지탱해주던 두 무릎들은, 이제 마구간에 들어온 두 마리 말들처럼, 비로소 후두둑 쉬는 것 같았다. 작가가 ‘숲’ 이라고 발음하거나 ‘풀잎’ 이라고 부를 때, 어쩌면 그 이름들은 그들이 가리키는 대상을 그토록 닮았는지. 우리가 그렇게 정하여 부르기 때문에 닮게 된 것일까, 아니면 정할 때부터 닯도록 지명된 것일까.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씩 조심스럽게 소리 내어 불러본다. 부끄러워 먼저 연락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름들도. 그들의 이름을 발음하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 편이 시큰해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