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랑하는 책 |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

2016. 12. 12. 17:05글/나의사랑하는책

김영하의 팟캐스트를 들으며 울었던 적은 두 번. 그 중 한 번은 박완서 작가님이 돌아가셨던 다음 날, 김영하 작가님이 다른 언급 없이 "그리움을 위하여"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주셨을 때였다. 다른 한 번은 정이현 작가의 "삼풍백화점"을 읽어주셨을 때. 그 사건에 대하여 '신의 심판'이라고 쓴 칼럼을 본 주인공이 신문사에 전화하여 따지는 장면에서 나도 함께 울었었다. 

그리고 오늘 세 번 째 나의 눈물을 부른 책은 최은영 작가의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였다. 역시나 아무 생각 없이 팟캐스트를 들으며 이것 저것 잔 일을 하고 있던 나는 결국 눈물로 화장을 포기한 채, 혼자 흐느끼며 옷을 갈아입고 운전대를 잡을 수 밖에 없었다. (누군가를 엘리베이터나 현관 앞에서 만났다면 얼마나 뻘쭘했을까. 만나기로 한 사람이 나의 부은 눈을 보고 놀라면 어떻게 대답할까 고민하면서.) 

순애언니가 연애편지를 받았을 때부터 눈물이 났던 것 같다. 그것은 마치, 느와르 영화에서 하얀 양복을 입은 배우는 기관총에 난사당해 피투성이로 죽는다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불행한 주인공에게 행복의 그림자가 비치면 으레 흘러나오는, "어쩐지 운수가 좋더라니...!"

나에게도 순애언니와 같은 식모이자 보모언니가 있었다. 나도 그 언니를 몹시 좋아하고 따랐다. 언니는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강원도 황지에서 우리 집으로 보내어졌다. 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셨고 오빠가 한 명 있다고 했다. 참 착했던 언니는 17, 18세 무렵까지 우리랑 함께 살다가, 다시 오빠가 불러서 대구로 떠났다. 조용필을 좋아했었고, 하늘색과 분홍색이 예쁘다고 했던 언니. 그러나 나는 당시에 너무 어렸고 철 없었다. 아니, 그 후에도 한참 나는 철 없었고 다른 이의 삶의 무게를 헤아리지 못했었다. 13살짜리 어린 여자 아이가 다른 집에 식모로 간다는 것이 과연 어떤 상황일지, 이기적이고 못됐던 나는 한 번도 제대로 연련하지 않았었다. 나중에 언니는 대구에서 결혼했고 딸을 넷 낳았으며 작은 과일 가게를 경영한다고 들었다. 언니로부터 다른 연락이 없는 까닭은 아마 잘 살고있기 때문일 것이다. 딸이 넷이면 반드시 행복할 것이다... 

소설은 간첩조작사건으로 비참하게 짓밟힌 한 가정에 대한 이야기라고 볼 수 있지만, 작가는 그 역사적 배경에 대해 정확한 연도나 사건의 명칭을 언급하지는 않았다. 대신, 억울하게 누명을 썼던 남자의 시각이 아니라, 그 아내의 처지, 그리고 그 처지를 바라보는 다른 여인의 눈을 통해, 여인들이 느낄 수 있는 아주 예민한 빛과 공기의 묘사를 통해 나의 마음을 저몄다. 처음 남편의 연애편지를 받고 그것을 품에 지닌 채 몰래 두고 두고 열어보던 작은 순애언니. 결혼 후 핑크빛 립스틱을 바르고 외출하여, "잘 살아보고 싶다"며 칼국수를 사주던 순애언니. 

"나에게는 부모가 없지만, 네가 마치 부모님 같았어. 나를 조건 없이 사랑해주었으니까." 라는 언니의 말을 듣고, 그의 남편을 구명하기 위하여 전단지를 돌리던 해옥은 "존경하는 대통령님께"로 시작하는 편지까지 청와대에 보냈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삶의 무게는 두 여인의 마음을 무디게 찢어놓았다. 누군가를 건져올리기 위해 정말로 애를 써 본 사람이라면, 이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어느 순간에는 그의 손을 놓지 않으면 나까지도 그 삶의 심연에 빠져버리게 되는 것이다. 어느 순간에는 마음을 모질게 먹고 그 손을 뿌리쳐야만 살 수 있는 것이다. 

이제야 내가 좀 자라고 나이를 먹어서, 그 때 나를 돌보아주던 보모언니의 마음도 헤아려진다. 조건 없이 그녀를 좋아했던 기억과 함께 이제 다시 서로 연락할 일이 없으리란 점도 잘 알 것 같다. 나 역시 누군가의 손을 잡아 일으킬 수 있다는 착각을 했던 적도 있었고, 그 손을 놓았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 비참한 소설 속에서 내가 마음 놓고 눈물을 흘릴 수 있었던 까닭은, 비록 나는 모든 인생을 끌어당기고 있는 거대한 죽음의 심연과 고통스런 구조악 속에서 무력할 지라도, 해옥의 대통령은 침묵했을지라도, 내게는 나의 손을 놓지 않으셨던 그 분이 계시기 때문이다.

소설 내내, 남루한 쓰레빠를  비루하게 삐져나온 발가락이나 지린 오줌, 혹은, 게걸스럽게 먹는 치킨 사이사이로 나는 주님께 손을 내밀었다. 어떤 현실은 소설보다 더 비참하다. 그러나 나는 마치 어린 아이가 무서운 곳을 지나갈 때, 꼭 잡고 있는 엄마의 손을 거듭 확인하듯이, 그렇게, 두려운 현실의 그림자 사이 사이를 통과할 때마다 그 손을 확인하며 끝까지 이 소설을 마주할 수 있었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병실을 가득 메우도록 펼쳐진 순애 언니의 날개를 바라보듯, 나는 기적을 믿는다. 용서를 믿는다. 지옥의 심연 아래로 떨어져 내려가던 나의 손을 놓지 않았던 신이 있으며, 오히려 나의 심연에 그가 대신 떨어졌지만, 다시 돌아와서 공의를 실현하실 것이라는 그 신화를 믿는다. 오늘도 내가 누군가의 손을 끝까지 잡아 줄 자신은 없어도, 내가 아니라 그 분이 먼저, 그리고 끝까지 붙드시리란 것은 확실히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