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성경공부 | 마음과 정성을 다 하여 심으리라 16. 사무엘상 2장 22-36절

2018. 9. 17. 17:05성경 공부 /영화와함께-2018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26살 남자의 순수한 절망에, 서른 넘은 이혼녀는 단호히 돌아섭니다. 허진호 감독의 2001년 영화 <봄날은 간다>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입니다. 은수는 지방 방송국에서 일하는 라디오 PD이고, 상우는 녹음 엔지니어입니다. 일로 처음 만난 둘은 곧 사랑에 빠졌지만 은수의 마음과 상우의 마음은 게속 엇박자를 냅니다. 은수에게 매달리고 집착하던 상우는 결국 이별을 통보받고, 은수의 차에 고의적으로 기스를 낸 후 서울로 돌아옵니다. 시간이 흘러 은수가 상우에게 한 번 더 찾아오지만, 이번에는 상우가 은수를 받아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베인 상처를 심장보다 높이 올리듯, 갈대밭에서 손을 허공에 들고 소리를 따면서 미소 짓습니다. 

상우의 나이를 지나 은수의 나이에 서니

상우보단 은수가 이해되는 것도 

(...) 

"라면이나 먹자".. "자고 갈래.." 라고 

노골적으로 유혹하는 은수의 말을 이해 못하고 

정말 라면이나 먹고 잠이나 자는 상우는 

어쩌면 처음부터 은수에겐 버겁게 순수한 남자였는지 모른다. 

조금은 날긋하게 닳은 여자에게

순수는 반갑지 않다. 

순수가 사랑을 얼마나 방해하는지

모르는 사람만이 순수를 동경한다. 

(...)

이제 이 나이에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고 

상우처럼 묻는 남자가 내게 온다면.. 

나 역시 은수처럼 그 남자를 피해갈 것이다. 


- 노희경 (드라마작가) - [각주:1] 


사무엘상 2장 후반에 이르면, 하나님의 사람이 엘리제사장에게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엘리는 당시 대제사장, 그러니까 정치 종교에 있어서 최고의 위치에 있었고,하나님의 사람이라고만 되어있는 이 무명의 선지자는, 아마도 엘리에게 있어서는 새까만 후배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전한 메시지는 하나님의 진실한 목소리였습니다. 정한조 목사님께서는 그 구절들을 읽으시면서 한 가지를 눈치 채셨습니다.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그를 택하여 나의 제사장을 삼아 그로 단에 올라 분향하며 앞에서 에봇을 입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이스라엘 자손의 드리는 모든 화제를 내가 네 조상의 집에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나의 처소에서 명한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백성 이스라엘의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스스로 살찌게 하느냐? (28-29절)


히브리어는 문법상 주어가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짧은 구절 안에 들어있는, 이 수많은 상처받은 '"나"들은 마치 상우가 은수에게 부르짖듯이, 하나님께서 엘리에게 절규하시는 것 같습니다 - 너에게 나는 어디 있느냐..! 너는 어떻게 나를 잊느냐..! 너의 사랑은 어떻게 변하느냐..! 우리는 하나님께서 홉니와 비느하스에게는 찾아가지 않으셨음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몇 번에 걸쳐, 마치 상우처럼 찌질하게, 찾아가셨던 사람은 오직 엘리 - 심지어 사무엘에게 그 권위를 이양하겠다고 이별을 통보하시던, 그 마지막 순간까지 찾아가서 매달리셨던 존재는, 이제 늙어서 이전의 사랑을 다 잊어버린 엘리였습니다. 아직도 '가만히 눈감으면 잡힐 것 같은, 마음이 저려오는'[각주:2] 그 사랑이 하나님께는 생생한데, 엘리는 자식들과 세상에 눈이 멀어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의 존재가 안중에 없습니다. 


세상의 사랑에서도, 너무 화가나서 '네가 계속 이러면 헤어질 수 밖에 없어. 헤어지자.' 라고 말했는데, 상대방이 정말로 "그래 어쩔 수 없지..."라고 대답한다면, 여전히 사랑하는 그 연인은 충격을 받을 것입니다. 원래 기대했던 반응은, "안돼!! 난 너 없이는 못살아..! 내가 잘못했어. 다신 안 그럴게." 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음 시간에 살펴보겠지만, 이 둔한 엘리는 사무엘을 통해서 그런 말을 들어도 가만히 있습니다. "이는 여호와시니 선하신 소견대로 하실것이니라 (3:18)" 그의 사랑은 식어버린 것입니다. 


세상에 적당히 익고 닳은 은수에게 상우의 순수한 사랑이 버거웠다면, 그것은 그녀가 이미 인간의 사랑이 덧없음을, - 서로에게 그렇게 기대하면 너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상우도 처음에는 몰랐지만, 인간의 사랑은 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에서 신의 사랑이 변하지 않는 "약속"이란 사실은 얼마나 다행인지요. "우리 주님은 우리가 아름다워서 반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봄날은 떠나갈 것이며, 결국 죽음에 굴복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분은 우리와 영원한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것은 순간의 느낌에 충실한, 언제든 변할 수 있는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그 분은 먼저 다가와서 저를 대신하여 죽으셨으며, 그렇게 저를 당신의 것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제가 그 분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기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려주고 계십니다. 그가 언약해주신 사랑은 나의 생명입니다."[각주:3]  

 

  1. 인터넷에서 쉽게 검색되는 노희경 작가의 글인데, 원래 출처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원문을 그대로 옮겨드립니다: 女子에게 少年은 부담스럽다 아직도 십센티는 더 클 것 같은 소년 유지태와 이제는 사랑을 조롱할 수도 있을 만큼 농익을 대로 농익은 여자 이영애가 커플이 돼서 러브스토리를 들려준다는 게, 처음부터 나는 억지스럽다고 생각했다.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내 예상은 적중했다. 둘은 헤어졌다. 다행… 이다. 한때는 상우처럼, 지금은 은수처럼. 이제는 기억도 아련한 첫사랑의 열병을 앓았던 때, 나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꼭 영화 속의 상우 같았었다. 그처럼 유머를 모르고, 눈치 없고, 맹목적이고, 답답했었다. 지금도 또렷이 기억나는 장면 하나, 눈오는 날 추리닝에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그의 집 창문 앞에서 오기를 부리며 떨고 있던 내 모습. 그때 내가 사랑했던 사람도 은수처럼 표독(?)했었다. 꽁꽁 언 발을 번연히 보면서도 그는 끝끝내 제 방으로 나를 이끌지 않았다. 이별에 대한 선전포고를 이미 했으니 그뒤의 감정수습은 모두 내 몫이라는 투였다. 당시엔 그 상황이 너무도 서러워 코끝이 빨개지게 울었었는데, 이제 그 추억은 그냥… 멋적을 뿐이다. 인생을 살면서 절대 잊혀질 것 같지 않은 장면들이 잊혀지고, 절대 용서될 것 같지 않은 일들이 용서되면서 우리는 여자로 혹은 남자로 성장한다. 누구는 그러한 성장을 성숙이라고도 하고, 타락이라고도 말한다. 그러나 나는 다만 과정이라고 말하고 싶다. 하루에도 열두번씩 무조건 어른이 되고 싶던 비린 미성년 시절, 나는 찐한 사랑 한번에 여자가 될 줄 알았었고, 실연은 절대로 안 당할 줄 알았었다. 이제는 그런 내 바람들이 당치 않은 기대였던 것을 안다. 사람들은 언제나 당면한 입장에 서서 상황을 이해하는 생리가 있다. 상우의 나이를 지나 은수의 나이에 서니, 상우보단 은수가 이해되는 것도 그런 의미에서 순리다. ‘라면이나 먹자’, ‘자고 갈래’라고 노골적으로 유혹하는 은수의 말을 이해 못하고 정말 라면이나 먹고, 잠이나 자는 상우는 어쩌면 처음부터 은수에겐 버겁게 순수한 남자였는지도 모른다. 조금은 날긋하게 닳은 여자에게 순수는 반갑지 않다. 순수가 사랑을 얼마나 방해하는지 모르는 사람만이 순수를 동경한다. 사랑이 운명이나 숙명이 아닌 일상의 연장선에 있다고 믿는 대개의 경험있는(상대를 바꿔가며 사랑의 열정을 몇번씩 반복해서 느껴본) 사람에게, 순수는 정돈된 일상을 방해하고, 그로 인해 사랑을 좀 슬게 한다. 상우의 순수가 은수의 일상을 방해하고 사랑을 버겁게 느끼게 하는 요소는 곳곳에 있다. 늦잠을 자고 싶은데 상우는 제가 한 밥을 먹으라고 재촉하고, 다음날 출근을 해야 하는데 새벽녘 서울에서 강릉길을 한달음에 달려와 포옹을 요구하며, 맨정신으로 약속을 하고 찾아와도 안 만나줄 판에 술 취해 급작스레 찾아와 철문을 두드리고 소리를 지른다, 게다가 엉엉대며 울기까지. 그 대목에 이르면 은수가 아닌 제삼자의 입장에서도 은근슬쩍 짜증이 인다. 저만 아프고 저만 힘들지. 어린 남자는 그렇게 이기적이다. 사랑만 하기에 인생은 너무도 버겁다 다수의 사람들은 은수가 상우를 선택하지 않은 것이 현실적인 가치기준의 잣대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박봉에 초라한 개량 한옥에서 사는, 홀시아버지와 매서운 시고모를 옆에 두고 치매를 앓는 할머니를 모셔야만 하는, 정말 누가 봐도 최악의 결혼조건을 가진 그 남자와 연애는 몰라도 결혼은 절대 할 수 없다는 계산이 은수에게 있었다고 말한다. 나는 그 이유에 반박한다. 은수는 그 남자의 처지보다 순수가 버거웠을 것이다. 사랑이 변하고, 권태가 일상이 되고, 키스도 무료해지고, 생계가 치명적인 걸 이미 아는 여자에게 사랑만이 전부인 남자는 부담스러울 뿐이다. 이제 이 나이에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고 상우처럼 묻는 남자가 내게 온다면, 나 역시 은수처럼 당연히 그 남자를 피해갈 것이다. 아직도 사랑이 안 변한다고, 사랑이 전부라고(직장마저 그만둘 만큼) 생각하는 남자와 격한 인생의 긴 여정을 어찌 헤쳐나가겠는가. 은수와 상우의 결별은 그런 의미에서 너무도 다행한 일이다. 드라마를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이즈음 한국영화의 눈부신 발전은 그닥 반갑지 않은 일이다. 안 그래도 적은 배우진이 너도나도 영화를 한다고 다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소원해서 될 일이라면 한국영화의 추락을 두손 모아 기원이라도 할 판이다. 그런 내 기원을 영화 <봄날은 간다>는 무참히 만든다. 드라마가 살길은 영화의 추락이 아니라 드라마의 발전밖엔 없다는 결론이 씁쓸하게 나를 채찍질한다. 노희경/드라마작가 [본문으로]
  2. 영화 봄날은 간다의 OST 중에서, 김윤아 노래, https://www.youtube.com/watch?v=vf6TWmxJZxY [본문으로]
  3. Timothy J. Keller, God's Wisdom for Navigating Life: A Year of Daily Devotions in the Book of Proverbs, Viking, Nov. 7, 2017. 9월4일자 묵상 중에서 변용했습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