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정원 | 건망증

2018. 10. 15. 11:38글/엄마의 정원

월요일 아침엔 늘 전 날의 성경공부를 올리고 주말 동안 밀린 집안 일을 하는데, 언제나 엄마가 전화를 하신다. "뭐하니?" 대개는 점심을 함께 먹자는 요청이신데, 애시당초의 용건과는 상관 없이 주말의 간략한 업데이트와 상황보고는 필수 과정이다. 그리고 늘 따라오는 엄마의 반응, "근데, 내가 왜 전화했지?" 그럼 나도 도우려 애쓴다, "엄마, 어떤 카테고리였어요? 먹는거? 교회? 아빠?" 그럼 엄마는 막 웃으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 이름을 부르는 동안 왜 전화했는지 잊어버렸어." 그럼, 나도 막 우습다. 예전에 - 그러니까 내가 훨씬 더 어리고 나의 뇌가 젊었을 때에는 엄마의 이러한 습관적인 건망증이 두려웠다. 왜 인간의 뇌는 이렇게 연약한걸까. 이러다가 치매에 걸리면 어떡하나. 그러나 지금은 나도 전화를 걸면서 용건을 까먹는다. 그리고 웃어넘기게 됐다. 아마도 치매라는 몹쓸병이 찾아온다 해도 우리 엄마는 여전히 사랑스러우실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건망증을 대함에 있어서 좀 더 의연해진 것 같다. 옛날에는 기억에 그 인간의 존엄성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뇌의 연약함을 못견뎌 했지만, 지금은 그 인간의 존엄성이 내가 사랑하는 신의 긍휼 안에 있다는 사실을 믿게 되었기 때문에, 설사, 아아 설사, 언젠가 시간이 많이 흘러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못알아보게 된다 하여도, 결국은 괜찮으리란 보장이 생겼다. 나의 기억이 나를 배신하지 않는 한, 부디, press me to realms on high. (찬송가 595장 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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