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줌마

2017. 3. 31. 16:22글/엄마의 정원

남편의 바램으로 시작했던 20대 청년 구역장이었지만, 실제 청년들을 만났을 때는 너무 사랑스러워서 나 스스로도 놀랐었다. 수 십 년 전이었다면 엄마 뻘이었을 나는 아이들을 존댓말로 대했다. 진심으로 존대해주고 싶었기 때문이었고, 한 편으로는 소중했기 때문이었다. 신문을 장식하는 그 이상한 젊은 아이들은 다 어디 있는 걸까. 모두 반듯하고 예의바르고 아름답고 대견했다. 교회에 오는 아이들이기 때문에 착한걸까. 물론 시간 관념이나 약속에 대한 책임감은 덜하다고 들어서 알고 있었는데, 그것도 곧 아이들이 나를 어려워하는 부분이 크기 때문이란 것을 느꼈다. 나만 몰랐었는데, 나는 그들에게 '어른'이었다. 


구역 식구들 중 한 청년이 우리 집을 단편영화의 로케이션으로 사용할 수 있는지 부탁해왔다. 5분짜리 과제였기 때문에, 우리 부부는 흔쾌히 응낙했고, 집을 청소하느라 분주하였다. 세 명의 청년들이 우리 집을 방문했을 때, 우리는 과자와 음료수로 환대하였다. 촬영 날짜를 잡고 자료 사진을 찍어갔는데, 며칠 후, 자료 사진을 보충해야 하니 다시 방문하고 싶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번에는 나 홀로 집에서 그들을 맞이했다. 역시 예의 바르고 얌전한 청년들이었다. 행여 일하는데 방해가 될까봐 나는 하고 있던 부엌일을 그대로 하면서 마실 음료수와 빵만 식탁 위에 두어주었다. 간간히 들려오는 그들의 목소리로 지금 어느 장면을 찍고 있는지 짐작해 볼 뿐이었다. 그러다 곧 나는 그들의 음성이나 태도가 내 앞에서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자기들끼리 있을 때는 자연스럽고 마음껏 이야기하는 모습이었다. 경이로움을 느끼면서, 나는 점점 나의 모습과 소리를 줄이고, 그들이 온전히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보일 수 있도록, 있는 듯 없는 듯, 집의 구석으로 숨어 다니기 시작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참 예쁘다는 것을 그 아이들이 알까. 


그러면서, 나는 우리 어머니와 할머니를 떠올렸다. 친구들이 우리 집에 오면 엄마는 마음껏 놀라면서 음식만 차레대로 밀어넣어주곤 하셨었다. 친구들과 함께 할머니를 만날 때면 할머니는 밥만 사주시고 방해될까봐 서둘러 자리를 피해주곤 하셨었다. 마음껏 촬영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숨죽여 있으면서, 어느새 내가 그들에게 촬영 장소로 쓸 수 있는 집을 소유한, 어려운 '아줌마'가 되었음을 실감했다. 아이들이 벗어놓은 신발은 낡고 싼 것들이었다. 이렇게 예쁜 아이들이지만, 현실에서는 취직과 등록금 등의 문제들로 고민이 많겠지... 


나는 늦은 결혼을 했고, 친구들 중에는 심지어 아직 미혼도 있으므로, 오늘 갑자기 경험한 '아줌마'라는 자리가 낯설었다. 그러나 내가 오늘 느낀 '아줌마'라는 존재의 자리는, 약간의 옥시토신과 아드레날린이 느껴지는 경험이었다. 아이들이 마음껏 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자리를 비켜주는 것. 언제든 먹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쥬스와 빵을 놓아두는 것. 아이들이 자기 집인 양 맘껏 웃고 떠들면 좋은 것. 집에 갈 때 과자라도 하나 더 챙겨주고픈 것. 나는 신경쓰지 말고, 우리 집에서 재밌게 열심히 잘 했으면 좋겠는 것. 나도 약하지만, 아이들은 더 약하고 귀해서, 그들이 반드시 경험해야만 하는 저 험한 세상이 걱정스러운 것. 우리 할머니가, 우리 엄마가 우리들을 바라보실 때에도 그러셨겠구나. 


그래서, 그렇게 다 주셨구나. 

' > 엄마의 정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엄마의 정원 | 건망증  (0) 2018.10.15
엄마의 정원 | 호박  (0) 2017.10.20
희귀암. 수선화.  (0) 2017.03.20
엄마의 정원 | 고구마 3  (1) 2017.02.01
엄마의 정원 | 가을도 떠나고 있다 (엄마는 여행중)  (1) 2016.1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