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성경공부 |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심으리라 20 사무엘상 6장

2018. 10. 30. 18:47성경 공부 /영화와함께-2018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 >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필립 K. 딕의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입니다.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주인공인 존 앤더튼의 생명을 구해줄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처럼 등장하며 영화의 대부분은 그것을 찾기 위한 주인공의 노력에 할애되지만, 실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비어있는 중력, 극을 이끌어가기 위해 감독이 이용하는 '맥거핀'입니다.[각주:1] 

사무엘상 5장과 6장의 언약궤는 마치 맥거핀처럼 움직입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언약궤에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며, 언약궤의 행방에 이목을 집중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언약궤를 통해서 정말 하고 싶으셨던 다른 이야기, 정말 중요한 주제 (어쩌면 한 인물) 안으로 우리를 이끌어 들이고 계십니다. 즉, 언약궤 자체에 어떤 특별한 저주나 축복이 서려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언약궤는 이방인 블레셋도 치고,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도 칩니다. 

블레셋의 점술가들이 처음으로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이집트의 기적들을 회상하며 속죄제를 제안하는 모습은 인상적입니다. 그러나 종교 전문가답다는 감탄도 잠시, 황금으로 쥐와 독종의 형상을 만들어 언약궤와 함께 이스라엘로 돌려보낸다고 할 때에는 어쩔 수 없이 이방인의 한계 - 그들의 좁은 신관과 세계관, 특히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전혀 없음이 드러납니다. 그들은 신과 함께 전염병의 저주도 함께 떠나보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무당이 푸닥거리하듯, 창조주 하나님을 향해서는 터무니없게 조악한 종교적 커뮤니케이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용납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끝까지 의심하는 블레셋 사람들을 아랑곳하지 않으며, 언약궤는 이스라엘의 영토, 벳세메스의 사람들에게 도착합니다. 이것을 정한조 목사님께서는 전쟁의 임무를 완수한 왕의 귀환처럼 묘사해 주셨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숨 바쳐 싸운 전쟁터에서보다 언약궤가 홀로 싸운 전쟁에서 죽은 블레셋인들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우리 역시 직장과 세상에서 목숨 걸고 싸우지만 아무 결실이 없을 때, 이러한 일을 경험하지 않습니까 - 정작 나는 가만히 있었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주변에 홀로 그 분의 섭리를 이루어 내시는 기적을 체험하신 적이 있습니까.)[각주:2] 

그러나 그 언약궤가 도착했다고 하여 하나님의 마음까지 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호기심으로 언약궤 안을 들여다 본, 수많은 이스라엘인들이 죽임 당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나자, 벧세메스인들의 반응은 이방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를 우리에게서 뉘게로 가시게 할꼬...!" 여기에서 누군가는 민수기를 인용하며 이렇게 쉽게 이야기할 것입니다, "말씀에 나온대로 규례를 갖춰서 언약궤를 다루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징벌의 모든 이유는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나마 다행이 기럇여아림의 아비나답이 기꺼이 그 궤를 받아 존중하였습니다만, 심지어 그는 레위인이 아니라 유다지파였기 때문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지키는가 안지키는가를 보고 계시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만약 율법이 문제였다면, 블레셋 인들이 언약궤를 수레에 태워 보냈을 때 그들부터 치셨어야만 했습니다. 레위인이 아닌 다른 지파가 언약궤를 맡는 것도 허락지 않으셔야 했습니다. 

즉, 모두 자격이 없었습니다. 아무도 그 언약궤에 가까이 갈 수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우리들 중 아무도 하나님 영광의 현존에 가까이 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는 건너갈 수 없는 간극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무엘상 5장과 6장에 걸쳐 언약궤가 가리키는 진실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엘르아살을 용납해 주셨을까요? 왜 블레셋이 만든 쥐와 독종의 제물을 참아주셨을까요? 그리고 왜 지금 저의 기도도 참아 들어주십니까? 언약궤가 가리키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아무도 돕는 사람 없이 홀로 전쟁을 이기고 돌아오는 왕은 누구입니까?[각주:3]

수 년이 지난 후, 언약궤가 비로소 예루살렘에 안치될 때, 다윗왕은 춤 추며 기뻐했습니다. 처음 언약궤를 옮기려 했을 때에는 웃사의 죽음으로 크게 낙심했으나, 하나님의 본심이 사랑이시라는 것을 - 결국 우리들을 받아주고 싶어하신다는 사실을 눈치채자마자 그는 말씀대로 예를 갖추어 언약궤를 모셨습니다. 하물며 그 분의 외동아들, 그리스도의 핏값을 주고 입양된 우리들에게는 얼마나 큰 은혜가 허락된 것입니까. 우리 시대의 언약궤 - 하나님의 말씀 - 즉,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우리 가슴과 삶의 중심에 모신다는 사실은 얼마나 무시무시하고 동시에 기쁜 일입니까. 그러나 그것은 다른 누구보다도, 어쩌면 우리 자신보다도 더 그 분께서 바라고 기뻐하셨던 일일 것입니다, "너를 구해 내신 용사 네 하느님 야훼께서 네 안에 계신다. 너를 보고 기뻐 반색하시리니 사랑도 새삼스러워라. 명절이라도 된 듯 기쁘게 더덩실 춤을 추시리라." (공동번역 스바냐 3장 17절)  




PS.1. 마이너리티 리포트가 주인공인 존 앤더튼을 구원해줄 것 같았지만, "시스템에 마이너리티 리포트가 있는게 아니라, 인간에게 마이너리티 리포트가 있다"는 것이 이 영화가 가리키는 핵심입니다. 즉, 영화 내내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쫒던 존 앤더튼은, 시스템의 오류가 아니라 시스템을 관장하는 최고 권력자에게 가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2. 2002년에 스필버그 감독이 창조해낸 디스토피아적 미래 세계는 그 현실성때문에 지금도 찬탄이 나옵니다. SNS에 로그인 할 때마다 제 취향에 맞추어 떠오르는 광고들을 보면서, 톰 크루즈가 상점 앞을 지날 때마다 홀로그램 광고가 떠오르며 "미스터 앤더튼" 이라고 친근하게 부르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1. "맥거핀 MacGuffin"이란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이 처음 사용한 말입니다. 히치콕의 영화 <싸이코>에서는 처음에 주인공이 돈을 횡령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관객들은 그 돈이 어떻게 될지 조마조마하며 지켜보지만 이야기가 흘러갈수록 돈은 중요하지 않게됩니다. 여기서 돈은 감독이 초반부에 관객들로 하여금 영화의 이야기 안으로 들어오게 만드는 맥거핀, 즉 "영화 등의 줄거리에서 중요하지 않은 것을 마치 중요한 것처럼 위장해서 관객의 주의를 끄는 일종의 트릭"입니다. (참고: 위키피디아) [본문으로]
  2. 누가복음 5장 5-6절: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본문으로]
  3. 이사야 63장 4-5절: 만민 중에 나와 함께한 자가 없이 내가 홀로 포도즙틀을 밟았는데 내가 노함을 인하여 무리를 밟았고 분함을 인하여 짓밟았으므로 그들의 선혈이 내 옷에 뛰어 내 의복을 다 더럽혔음이니 이는 내 원수 갚는 날이 내 마음에 있고 내 구속할 해가 왔으나 내가 본즉 도와주는 자도 없고 붙들어 주는 자도 없으므로 이상히 여겨 내 팔이 나를 구원하며 내 분이 나를 붙들었음이라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