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 커피발전소

2016. 12. 8. 18:03맛있는/까페연가

명실공히 나의 가장 사랑하는 카페. 심지어, 지도앱에도 나와있지 않은, 간판도 높이 걸지 않고, 당인리 발전소 정문 앞에 있어서 이름도 무심하게 "발전소"라고 붙인, 100주년기념교회 또래 친구들의 아지트, 독일 바로크 클래식 채널을 틀어주고, 가끔 운 좋으면, 유쾌한 페이소스의 최민석 작가님께서 작업에 몰두하고 계신 모습도 볼 수 있는, 주변에 아무리 트렌디한 카페와 음식점들이 넘쳐나도 아껴두어 매일 매일 가고싶은 카페... 직장 다니면서 일에 지쳤을 무렵 나의 소박한 소원 중 하나는 이곳에 와서 아무 걱정 없이 종일토록 나무 퍼즐을 맞춰두고 아무 책이나 제목 끌리는대로 읽는 것이었다. 

쉬크하고 말없으신 사장님은 과거 모 인터넷서점 임원이셨다는 소문이 있었으나, 확인할 필요를 느끼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이 카페는 벽과 탁자 위에 온통 가득 책이 쌓여있기 때문이다. (즉 책들을 보는 순간 나는 황홀하여... 그 소문의 아우라가 깨질까하는 두려움에 확인하지 않고 그냥 믿기로 했다.) 사장님은 장사에 무심하신 듯 보이기도 하는데, 손님들에게 친절하지도 그렇다고 무례하지도 않으시다. 더 주는 것도 덜 주는 것도 없이 꼭 필요한 말만 하시고, 미소도 조심스럽게 지으시며, 언제나 책을 읽고 계신다. 가끔 손님들이 말을 붙여도 늘 그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계신 편이었다. 한 번은 내가 이 곳에 장갑을 두고는 까맣게 잊고 있다가 한 달 반만에 찾아왔는데, 내게 장갑을 꺼내주셨었다. 역시 아무 말 없이, 예의바르게 excuse me... 하는 듯한 아주 희미한 미소로 조심스레, 그렇게 나조차 잊고 있던 장갑을 내밀어주셨었다. 

화장실에는 팀버튼 전시회의 포스터가 붙어있고, 옹기종기 화분들은 봄 여름 가을 겨울 물을 머금고 있으며, 카페 안팎은 각종 문화공연과 예술가들의 팜플렛들 그리고 넘치는 책들과 함께 최소한의 손길로 다듬어진 나무 가구들로 꾸며져있다. 사실, 나는 사장님께서 카페 밖의 벤치를 사포질하는 모습을 눈여겨 보았었는데, 하루는 그 벤치가 없어졌길래 여쭤보았더니 누군가 훔쳐갔다고 하셨다! 허름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통나무 하나였는데... 참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까닭은, 아마 사장님께서 정성껏 가꾸고 계신 모습을 내가 우연히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카페는 사장님의 손때가 묻어있다. 밤 10시면 어김 없이 문을 닫으시고, 모든 휴일에도 문을 여시며 (심지어 구정 추석도 모두 여시길래 가끔 나는 사장님의 가족 관계가 걱정스럽기도 했었다.) 금요일 밤 10시 이후에는 이따금 친구들과 함께 무비나잇 하시는 모습을 볼 수도 있다. 대개 옛날 영화를 틀어주셨는데, 내가 집에 가려고 짐을 꾸리면 역시 조심스럽게 "함께 보셔도 돼요." 라고 말씀하셨었다. 

이곳에서 수많은 구역모임을 했었고, 친구들과 정말 많은 수다를 떨었다. (물론 카페 분위기는 숙연하여 소리 높여 이야기할 수 없고 입을 열 때면 모든 손님들의 눈치를 보아야 하지만) 소개팅도 했었고, 부모님과 이모들도 모시고 왔었고, 남편과 연애하기 전에도, 연애할 때에도, 그리고 결혼한 이후에도 수없이 들르고 있다. 지금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도 사장님은 조용히 책을 읽고 계시다. 낡았지만 다양한 스펙트럼의 소리를 낼 줄 아는 나무 스피커를 통하여 어슴푸레 푸른 시간에는 바흐의 피아노곡을 틀어주셨다가 해가 지자 빅밴드 재즈곡을 틀어주신다. 카페는 단지 음료수를 팔고 잠시 앉을 곳을 제공해주는 공간이 아니라 문화를 팔고 문화의 아우라를 전해주는 곳이라는 관점에서, 나는 이곳이 아무 선전 없이, 블로그 없이도, 아주 오랫동안 버텨주었으면 좋겠다. 이미 합정동도 젠트리피케이션의 몸살을 앓고있으며 바로 곁에 또 다른 카페가 공사중인데, 이 곳은 기적처럼 살아남아주기를. 심지어, 와이파이 비번조차 Plan C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