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Y, NY | 뉴욕의 첫인상

2016. 12. 29. 00:01글/New York, New York


뉴욕시립대학교에서 합격통지를 받았을 때, 뉴욕은 도무지 알 수 없고 두려운 장소였다. 학교에서 보내온 공문에는 시내의 사설 기숙사 명단이 들어있었고, 떨리는 마음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전화를 돌려보았지만, 나의 머리를 누일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모두가 짧고 차갑게, 나를 위하여 남아있는 자리는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리스트 마지막 기숙사의 남자는 건조한 동양 악센트에서도 간절함을 느꼈는지, 조금 더 길게 답해주었다, “방이 없어요. (한숨) 더 이상 방이 없어요.” 라는 그의 운율이 마치 도끼의 랩처럼 인상적이어서, 나는 잠시 갈 곳 없는 처지를 잊고 그 기이한 여운에 잠겼었다. 사람이 너무 많아 숙소가 없는 뉴욕이라는 도시는 역설적으로 참 고독한 곳 같았다.  


처음으로 케네디 공항에 내리던 날, 베이사이드에 살고 계시던 이모부께서 먼 길을 나와 주셨다. 우리는 곧장 32번가의 코리아타운으로 가서, 게시판에 붙어있던 룸메이트 구인 광고에 전화를 걸었고, 곧 나는 원 베드룸 아파트를 다른 두 명의 여학생들과 나눠쓰게 되었다. 침대와 책상 용도의 작은 상 그리고 스탠드를 100불에 불하받았는데, 석 달 후, 다른 한국 학생에게 90불에 팔고 몸만 나왔었다. 어쨌든, 그렇게 번개처럼 계약을 성사하여 트렁크를 풀어놓고 숙소 앞을 탐색하러 나갔을 때, 놀랍게도 연락이 끊겼던 의류학과 대학 동창을 만났다! 그녀는 이미 파슨스를 졸업하고 어느 회사에 취직한 상태였다. 얼떨떨한 나에게 친구는, 내일이 본인의 생일이니 소호의 한 레스토랑으로 초대하겠다고 하였다. 소호가 어디인지도 모르는 나에게. 


다음 날, 나는 선물을 사서 약속 장소를 찾아갈 계획으로 현금과 지도를 들고 거리에 나섰다. 은행계좌도 없고 전화도 없던 나로선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시간을 넉넉히 잡고 움직여야만 했다. 그러나 어리버리한 관광객처럼 보이는 동양 소녀에게 사람들은 불친절했고, 나는 여기저기를 헤매고 다니다 결국 여유 시간을 모두 허비한 후에야 한 레코드 가게에서 수중에 있던 돈에 꼭 맞는 DVD를 고르게 되었다. 긴 줄을 초조하게 기다려 드디어 나의 차례가 되었을 때, 위압적으로 보이던 스킨헤드와 피얼싱의 건장한 흑인이 냉정하고 날렵한 태도로 나의 DVD를 계산대에 찍었는데, 그만 내가 알지 못하는 숫자가 더해졌다 - 뉴욕은 세금이 가격표에 기재되지 않는다는 것을 깜빡 잊었던 것이다! 나는 망연자실한 눈으로 계산대에 찍힌 가격을 바라보고, 그 흑인을 바라보고, 다시 그 가격을 바라보았다. 숙소에 되돌아가 모자란 현금을 가지고 다시 이 가게로 돌아와 저 긴 줄을 다시 기다려 이 DVD를 산다면, 엄청난 지각이 확실했다. 손에 들고 있던 달러를 도로 넣으며 한숨을 푹 쉬고 고개를 떨군 채, “I will be back... (터미네이터의 대사를 그대로)” 뱉으며 발걸음을 돌리는 것 외 다른 방법은 없었다. 그런데, 그 덩치 큰 흑인이  “잠깐만!" 하고 나를 불러 세웠다. 그는 말없이 재빠른 손놀림으로 기계를 조작하더니, 이윽고 모니터의 숫자를, 세금을 포함했는데도 가격표에 적혀있던 이전의 숫자와 똑같이 맞춰주었다. 


그 크고 세련되고 무서워 보였던 흑인이 나를 위해 - 바보 같고 촌스러운 동양 여자 아이를 위해 - 마법을 부려준 걸까. 내 등 뒤로 길게 늘어선 바쁜 사람들이 보내는 무언의 압력을 뚜렷이 느꼈지만, 나는 너무 감동을 받아서 그냥 그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그래서, 그 때 나의 영어 실력으로 가능했던 최대의 감사 표현을 발음했다,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땡큐 베리 머치!” 그러나 무표정의 그는 나를 바라보지도 않고 나직한 바리톤 음색으로 노래하듯 대꾸할 뿐이었다, “Enjoy." 


이것이 뉴욕의 첫인상이었다: 불친절하지만 친절했던 곳. 차갑지만 따뜻했던 곳. 어떤 이는 뉴욕이라는 도시가 사람들을 미혹하여 속게 한다고도 말했다. 둘러싼 화려한 이미지들을 보며, 마치 자신이 그 쇼윈도우의 주인공인 양 착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이는 그것을 꿈이라 부르기도 했었다. 그러나 나에게 뉴욕은, 어둡고 위압적이며 불친절하고 냉정하고 비싸고 거만해 보이지만, 실제 경험해보면 온 세계의 모든 민족을 아우를 만큼 관대하고, 가장 부유한 사업가와 가장 가난한 예술가를 모두 품을 만큼 자비로운 곳이었다. 


휘황찬란하게 북적이지만 몸서리치게 외로운 곳. 내가 심한 열등감에 고개를 떨구거나 실망하여 몸을 돌이킬 때마다 나의 어깨를 탁 치며 눈을 찡긋 하는 곳. 인정사정 보아주지는 않지만, 마법 같은 선물을 주는 곳. 고맙다 표현해도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곳. 나는 뉴욕을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