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성경공부 |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20170122

2017. 1. 26. 11:08성경 공부 /일반

이곳은 100주년기념교회의 2017년도 구역성경공부를 나눈 후 정리하는 페이지입니다. 이재철 목사님의 성경공부 말씀은 2시간 가량의 구역모임에서 다 소화하기에는 너무 무겁기 때문에, 교회 홈페이지 수요성경공부에서 음성파일을 들으시거나 동영상을 먼저 보고 모임에 참석하실 것을 권유 드려요 (말씀 동영상 링크 클릭) 이곳에는 그 내용보다는 저희들이 소화하고 적용하는 이야기를 위주로 적어두려 합니다. 아무쪼록, 성령님께서 도우셔서 저희가 받았던 은혜가 함께 전달되기를 기도합니다! 

목사님의 첫 번째 질문은 “지난 한 해를 돌아보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 삶을 스스로 평가하고, 혹시 진보가 없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시간을 그냥 보냈다면, 한 해 늙은 것이고, 진보가 있었다면, 한 해를 번 것이라고 하셨지요.

저는 Tim Keller 목사님께서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장) 시리즈의 첫번째 설교에서 하셨던 말씀을 떠올렸습니다. 대개는, “나는 어떤 직장에 붙었다.” 혹은 “나는 어떤 학교에 붙었다.” 혹은 창업을 했다거나 자격증을 땄다거나... 하는 행위의 일들을 떠올리기 쉬울 것 같아요. 한 발 더 나아가, “나는 교회에서 구역장 (혹은 권찰)로 섬겼다”거나 이러저러한 봉사와 희생을 했다고 말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본질적인 진보가 아닐 것입니다. 팀 목사님께서 설교를 마무리하셨던 부분을 그대로 번역해 드리면:

나는 종교적 열심이나 선행 뒤에 숨어있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데 자라가고 있는가?
작년에 비해 나는 더 평온한가? 작년에 비해 나는 더 겸손한가? 나는 더 강한가? 더 친절한가? 
이전보다 나는 더 타인을 포용하는가? 이전보다 나는 더 인생을 사랑하는가?

선행에 그치지 말고 그를 만나라. 그리고 새로워지라. (Timothy J. Keller 목사님의 설교, Love and Practical Graces 중에서) 

***

마가복음 8장에서 10장에 걸쳐 자신의 죽음을 세 번 예고하실 때, 예수님께서는 본인을 “인자 (사람의 아들)”라는 3인칭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첫 질문,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의 배경이 되는 장소는 한적하고 종교적인 장소가 아니라, 가이사랴 Caesarea Philippi - 시저, 황제의 이름을 딴 도시, 즉, 인간의 욕망이 부딪치고 팽배한 곳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나는 너에게 어떤 의미인가” 물으실 때, 그 장소는 교회의 성경공부 모임이나 양화진 묘원의 부드러운 석양 아래가 아니라, 압구정동이나 명동의 시내 한 가운데, 내가 생계를 위해 가장 치열한 곳 - 나의 직장, 학교, 나의 삶에서 가장 열망하는 장소가 될 것입니다.  

이 때, 베드로 사도의 대답이 놀라웠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가장 높은 경우를 생각해보았자 엘리야, 즉 우리 같은 사람 중 한 명이라고 대답했지만, 베드로 사도는 당신이 나의 모든 것 - 나의 구원자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정답을 이야기했지만 사실은 정답을 모르고 이야기했다는 것은 곧 뒤에 나옵니다. 여하튼, 이 고백의 진정한 뜻은 이것입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이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나의 구원자입니다. 나의 생명을 구속하시고 나의 삶의 주인이 되실 분. 어떤 이에게는 그것이 돈이나 직업일 수 있고, 어떤 이에게는 가족일 수 있고, 어떤 이에게는 심지어 소명일 수도 있지만, 내게는 당신입니다. 내가 나다울 수 있는 참된 이유, 내가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는 바로 당신입니다. 여기에서 헬라어로 “당신”이 강조되어 있다고 하셨어요.  

또 다른 키워드는 “비로소”입니다. (8장 32절) 지금 만약 애인이있다면, 그 사랑하는 사람에게 “당신은 나를 사랑하세요?”라고 묻거나 “이 이야기는 다른 사람에게는 하지 말아 주세요.”라고 부탁하는 순간이 있겠지요. 제게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식으로 말씀하시는 장면이 짠해요. 베드로가 잘 알 지 못하면서도 어찌됐든 정답을 이야기하자마자, 마치 기다리셨다는 듯이 말씀을 이어가시는데, 그것이 제게는 찐한 애정표현으로 느껴지네요. 주님은 베드로조차도 준비가 안 되었다는 것을 알고 계세요. 그러나 정말 시간이 없으신 거에요. 말씀은 해주고 싶으시고, 고민을 나누고 싶지만, 제자들이 준비가 되어야 하는데, 정말 조금이라도 기미가 보이니 “비로소” 털어놓으신 것이지요.

당시엔 “부활”이라는 개념이 없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제자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들이 이렇게 알아듣지 못하는 까닭은, 십자가 사건 이전에는 한 번도 부활의 사례가 없었던 것은 물론 부활의 개념도 없었기 때문이지요. 신화나 설화, 어떤 철학 사조에도 없는 개념이었어요. 우리는 ‘부활’이나 ‘은혜’에 대해서 비교적으로 믿기 쉬운 문화를 살고 있어요. 심지어 드라마에서 도깨비도 부활하니까요. 예수님께는 부활의 개념도 없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죽음과 다시 살아나심을 설명해야하는 어려움이 있으셨을 거에요. 

너무나 소통하고 싶지만 상대방이 아무 것도 모를 때, 그가 너무 수준이 못 미치며 다른 차원에 있을 때, 즉, 히브리서 1장을 보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마지막 언어였다고 하지요. 하나님의 구속 사역과 사랑에 대하여 인간은 이해할 수 있는 차원에 있지 않았지만, 예수님께서 친히 인간의 약함을 입고 우리에게 내려와 주셨고, 오직 메시야로서 죽기 위해 태어나셨어요. 제자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해요. 만약 제가 그 시대에 태어나서 제자가 되었다면, 다시 말해, 제가 만약에 예수님을 사랑하여 나의 가족과 가산을 모두 버려두고 그를 쫓았다 해도, 아마 저 역시 이 죽음과 부활의 말씀을 이해하지는 못했을 것 같아요.

그러나 결국엔 제자들도 인식의 한계를 뛰어넘고 그 사랑과 죽음과 부활을 알게 되었지요.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미리 말씀해 주셨기 때문일 것이고, 실제로 살아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이었을 거에요. 자신의 시선과 욕망에 갇혀있다가 하늘의 시선으로 자신과 주님을 보게 된 거에요. 이 “객관화”에 대하여, 이미 주님께서 스스로를 “인자”라고 부르실 때, 먼저 본을 보여주셨어요. 예수님께서도 우리와 같은 인간의 한계 안에 계셨지만, 그 분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자신을 보고 계셨어요.

객관화는 요즘의 화두이고 트렌드이기도 해요. 제가 엊그제 본 TED에도 이 ‘객관화’로 나쁜 습관을 버리는 법이 있었어요. 그렇다면, 세상의 화두인 객관화와 기독교의 객관화는 무엇이 다를까요? 저는 세상의 지혜가 있기 전, 기독교에서 먼저 끊임없이 이 객관화를 이야기해오고 있었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천동설을 믿고 있던 인간들의 기대와는 달리, 하나님께서는 지구를 태양계의 중심에 두지 않으신 것처럼. 심지어 우리가 속한 태양계조차도 우주의 변방에 있어요. 사람들은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 자신이라고 생각하지만, 성경의 큰 흐름 속에서 이 위대한 이야기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셨어요. 궁극의 객관화. 크리스챤이란 이것을 깨달은 사람일 거에요. 

어쩌면, “객관화”라는 표현은 얼핏 너무 딱딱하게 들릴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저는 그것을 이렇게 해석해요, “주님께서, 나의 사랑하는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스런 눈으로 바라보고 계시다.” 세상이 나를 어떻게 보든, 내가 나 자신을 어떻게 보든 상관없이, 예수님의 시선 - 부자의 수 억원보다 과부의 몇 천원을 더 기뻐하셨던 주님의 시선이 나의 객관이고 나의 현실이다. 이것을 위해 그 분이 십자가에 달리셨고, 3일 만에 살아나셨다 - 이토록 절망적인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계속 보시기 위하여. 이것을 믿는다면 변화가 가능하리라 생각해요. 그래서 말씀을 읽어야 하고, 공동체 안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말씀의 검은 나의 왜곡된 인식 체계와 뒤틀린 세계관을 쪼개어, 결국은 나를 죄에서 자유롭게 해주실 거에요. 이 천년 전에 제자들에게 그렇게 해 주셨던 것처럼, 지금도 살아계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믿음 안에서 - 성령님 안에서, 계속 말씀하여 주시고 직접 만나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MP3는 100주년기념교회 홈페이지 http://100church.org 의 "수요성경공부" 메뉴에서 다운로드 받으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