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러브레터 - 이와이 슈운지

2017. 2. 22. 13:32성경 공부 /영화와함께-2018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송이들은 언뜻 보기엔 똑 같은 모습, 똑 같은 하얀 색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결정 하나 하나가 마치 정교하게 만든 공예품처럼 아름답다. 기적 같은 아름다움- 눈이 내린다는 것은 기적이 하늘에서 쏟아진다는 뜻이다. 영화 <러브레터>의 첫 장면은 하얀 눈밭에서 카메라가 점점 공중으로 멀어지면서 주인공이 산을 내려가는 장면을 줌 아웃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개미처럼 작아지는 여주인공처럼, 그리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작은 눈송이들처럼, 인간 개개인은 미미하고 보잘 것 없으며 참을 수 없이 가볍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그 분의 소중한 작품, 존귀하고 특별한 존재이다. 

이와이 슈운지 감독의 <러브레터>는 인간 존재의 연약함과 익명성, 집단 속에서- 혹은 유전되는 혈통 속에서 이해되는 개인, 그리고 命名 한다는 것과 존재한다는 것, 기억한다는 것과 존재한다는 것 사이의 관계를 날줄과 씨줄로 엮어 놓은 작고 깔끔한 소품이다. 또한, 결코 어렵지 않다는 점에서, 그리고 감독 자신이 가볍고 재밌게 만들었다고 고백하는 점에서 (평론가들의 의견과 상관 없이) 우리들에게 좋은 영화일 것이다. 


이름과 얼굴이 닮은 세 명의 인생을 걸쳐놓은 것은 키에슬롭스키 감독의 <베로니카의 이중 인생>과 닮아있고, 도서관 카드에 적인 이름을 따라가는 것은 재패니메이션 <귀를 기울이면>과 닮아있다. (주: <베로니카의 이중 인생>은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성질을 고통스럽게 찾아 헤매는 영화라는 면에서 <러브레터>와 같은 선상에 놓여있다. <귀를 기울이면>은 <러브레터>와 매우 비슷한 발상과 소재를 갖고 있지만, 발표된 시기가 거의 같으므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한편, 내용면에서는 두 주인공의 엇갈린 성장영화이다: 진실이 드러나면서, 히로코는 지금 자신의 곁에 있는 진정한 사랑을 인정하고 현실을 받아들이게 되며, 후지이는 자신이 사실은 사랑받고 있었음을 깨닫고 현실을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 


이 영화의 담론은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의 고찰이다. 영화 안에서 삶과 죽음은 경계를 맞대고 있으며, 인간은 하루 피었다 다음 날 말라 사라지는 풀과 같다: 소년 후지이가 바람에 날리는 하얀 커튼 뒤에서 책을 읽다가 마치 사라지는 것 같은 환각을 보는 장면은 관객들에게 질문한다- 당신들은 보고 있지만, 그는 정말 거기 존재하는가? 만년설이 덮인 산의 계곡 안 어딘가에 얼어붙어 있는 그의 시체- 연인은 그를 기억하지만, 그는 정말 거기 있는가? 

또한 참을 수 없이 가벼운 개개인: 히로코는 자신이 후지이와 닮았기 때문에 사랑받았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자전거를 타고 가던 후지이는 히로코가 자기 이름을 부를 때에 뒤돌아 보지만 곧 대중들, 그것도 교복이나 제복을 입은 사람들 속에 파묻힌다- 개인은 세상의 너무 많은 사람들 중 하나일 뿐이다. 영화 안에서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이름이나 사진, 주민등록증의 카피, 혹은 졸업앨범의 주소와 같은 연약한 기록들 뿐이다. 

기록이라는 매체의 하찮은 대중성과 익명성 속에서, 소년 후지이는 자신의 이름을 도서카드에 남기면서 희열을 느낀다- 그것은 자신이 애정을 느끼는 사람의 이름이기도 했다. 여기에서, 자신의 흔적과 사랑하는 사람의 흔적을 남긴다는 개념은 은밀히 에로틱하다. 본능적으로 모든 동물들은 자신의 유전인자를 후대에 남겨서 자신의 흔적을 이어가고 싶어하며, 그러한 경쟁 속에서 우성인자가 살아남아 진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진화론의 논리이다. 

그러나 단순히 진화의 본능만이 작용한 것일까…? 결국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 (주: 프로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도서카드 뒤에 소년 후지이가 정성껏 그려 놓은 소녀 후지이의 초상)이 감동을 주는 까닭은 그가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에서 한 사람을 특별하게 여기고 사랑해 주었기 때문이다. 산 위에서 히로코가 초혼하는 장면 역시 같은 이유로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우리는 매일,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잘 지내시나요?" (오겐끼 데스까) 라는 인사를 나누지만, 히로코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모든 그리움과 애타는 사랑을 그 일상적인 용어에 담아 불렀을 때, 그것은 같은 음절을 지닌 "오겐끼 데스까"와 특별하게 구별된다. 


히로코는 그녀의 기억 안에 얼어붙어 있는 연인 후지이로부터 벗어나야만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잘 지내시나요? 나는 잘 지내요." 라는 인사는 과거를 향한 그녀의 필사적인 작별인사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사랑한 것에 대한 고통스러운 몸부림- 혹은, 영원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는 모든 인간들이 겪어야 할 통과의례.) 그러나 소녀 후지이의 경우는 그와 반대방향으로 간다: 그녀는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야만 현실의 가치를 제대로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녀는 과거로부터 빚을 지고 있다. 

히로코가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으면서 새로 태어나던 바로 그 시각 (산을 향해 외칠 때 그녀의 겉옷이 벗겨지면서 안의 붉은 스웨터가 드러나는 장면은 그녀가 붉은 갓난 아기, 赤身으로 태어난다는 은유이다.) 생사를 다투던 후지이도 할아버지의 헌신으로 새롭게 소생한다. 새로운 세대를 상징하는 후지이가 옛 세대를 상징하는 할아버지의 헌신으로 목숨을 건진다는 설정은 이 영화를 노스탤지어의 영화로 만들어주는 요소들 중 하나이다. 다시 정확히 말하자면, 감독은 이 영화에서 key word로 견지하고 있는 코드, "copy"와 "반복"을 "세대 ("닮음"과 "유전자")"로 확장시킨 것이다. 

다시 말해, 반복되는 역사와 유전되는 닮음 안에서 감독은 새로운 희망을 끄집어 내었다. 결국 우리 존재는 "닮음"과 "특별함"으로 이루어져 있다. 시간이 흐르면 존재했던 것들은 사라지고, 전도서의 말씀처럼 그 모든 일들은 반복되며,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인간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안식한다. 인간 존재는 다만 기억의 소산이다. 우리의 자취는 자손들에게 남는다. 감독은 반복되는 가정사 안에서 전통에 의거한 (할아버지에게 의지한) 구원을 보여줌으로써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진실을 얻는 이 영화의 맥락에 위로를 더했다. 


사람들이 노스탤지어에서 위안과 희망을 느끼는 까닭은 현재와 현실에서 무언가 갈증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현재에만 존재할 수 있다. 게다가 노스탤지어를 자극하고 이용하여 만든 이 영화조차도 조금 더 깊이 해부해보면 기실 매우 현대적인 발상에 근거해 있다. 두 주인공들은 서로에게 편지를 보내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에게 편지를 보낸 셈이다: Virtual Reality- 자신에게 현실이라고 느껴지는 것만이 현실이다! 얼마나 많은 경우 우리들은 다른 이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 혹은 자신에 대한 욕망의 또 다른 버전을 창출하는가? "사유는 없고 감각만 있으며, 창조는 없고 표면만 있다."는 비평가들의 공격에 이와이 슈운지는 가장 현대적으로 답한다, "나는 걸작을 찍을 생각이 없다. 다만 걸작의 기분을 만들 뿐이다." 


우리 크리스챤들은 스스로에게 현실을 속일 필요가 없으며, 노스탤지어의 진통제로 세상의 치열한 고통을 달랠 필요도 없다. 또한 우리들은 스스로 특별해지고자 노력하지 않아도 하나님 앞에서 특별하고 소중한 존재들이다. 성경은 우리들이 연약한 동시에 강하다고 말씀하시며, 개인적으로 구원받는 동시에 공동체적으로 존재한다고 말씀하신다. 우리들이 인간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신의 존재 앞에 겸손하면, 그 분은 오히려 우리를 특별히 존귀한 자로 여겨주신다. 

만약 우리가 도서카드 뒷면에 정밀하게 그려진 초상화 정도가 아니라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신 바 되었다"고 하신 말씀을 믿는다면, 일상의 하루 하루는 각기 다른 눈의 결정처럼 매일 새롭고 아름다워질 것이다. 우리가 공동체에서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소중한 존재들인지를 바르게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정말로, 우리들에게 시간이 주어졌을 때, 서로 온전히 사랑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