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ad FC 038 격투기 관람기

2017. 4. 15. 20:43글/일상

남편의 옛날 운동선생님이 출전하신다는 것 외 다른 아무 정보 없이, 정말 딱 보기에도 운동과는 거리가 멀어보이는 우리 부부가 오직 선생님을 응원하려는 일념으로 온 낯선 이곳, 장충체육관. 본경기가 무엇이고 영건즈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어리버리 3시간 일찍 온 바람에, 신인들의 데뷰전부터 경기를 보기 시작하여 거의 4시간을 관람했다. 

운동하는 사람들이 오는 곳이라 그런지 들어올 때 홍보차 구운 달걀을 줬고 가장 큰 광고판은 축협이었으며 편의점에서도 육포가 가장 상석에 있었다. 이 생경한 분위기. 나는 선수들의 펀치보다 사회자의 발성에 더 감동을 받는 종류의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곧 격투기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제일 먼저 내 눈에 띈 것은 커다란 스크린의 좋은 화질과 스피커에서 울려나오는 훌륭한 음질, 그리고 화려한 조명과 라운드걸이었다. 특히 현실에서 본 라운드걸은 게임에서 튀어나온 듯 너무 비현실적이었다. 아, 저 모습이 남자들의 환상 속 여자들의 모습이구나. 그리고 이어지는 선수들의 쇼맨쉽. 처음엔 과장되고 우스워서, 그들이 고함을 지르거나 가슴을 치거나 하는 행동들이 마치 우리 세 살짜리 조카가 놀이터에 입장할 때 보이는, 본능적인 즐거움의 표현인 것 같았는데,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도 모르는 새 그들의 유쾌한 자아도취에 열광적인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우리가 응원하던 기원빈 선생님은 출전한 선수들 중 가장 해맑았다. 상대방은 프랑스어를 쓰는, 마치 아프리카의 전사같은 흑인이었고, 가장 무서워 보였다. 신체조건은 둘 다 비슷했다: 키가 크고 늘씬하며 근육질의 몸매. 경기 초반, 기원빈 선수의 스트라이크가 더 우세했기 때문인지, 상대방은 유럽챔피언다운 노련함으로 그라운드 싸움으로 경기를 이끌었고, 결국 기원빈 선수는 백초크에 기권할 수 밖에 없었다. "아니, 목조르기가 반칙이 아니라니!" 격투기 생짜 초보의 분노에도 불구하고, 기원빈 선수에게는 너무나 아쉬운 패배였다. 그러나, 처음엔 더 강세였던 경기를 펼쳤고 다치지 않았으니, 그것만으로도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어떤 남자 아동 교육 전문가는, 남자들의 가장 큰 장점이 굴하지 않는 '농담'이라고 했다. 경기를 보는 내내, 나의 마음 역시 그러한 남자들의 본능과 남자들의 즐거움과 남자들의 세계에 대하여 무언가 마음 짠한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선수들은 혹독한 체중 감량을 견뎠을 것이고, 긴 시간을 투자해서 이 경기에 나왔을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그들의 인생이 걸린 만큼 그리고 경기가 재미있는 만큼, 동시에 무언가 진지하고도 슬픈 것이 있었으며, 또한 너무나 농담 같고 허무한 면도 있었다. 어떠한 불꽃, 어떠한 감흥에 온 몸을 (문자 그대로) 던지는 듯한 남자들. 다른 잡념없이, 링, 상대방, 그리고 격투. 

5분 동안 숨막히는 8각의 링, 그리고 꿀같은 1분의 휴식. 그렇게 웃고, 울고, 소리 지르고, 때리고, 맞고, 찢기고 피 흘리고, 이기거나 지고. "져서 어떡하죠?" 기원빈 선수가 어느새 응원석으로 다가와 멋적게 웃는다. 참, 그게 남자들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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