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성경공부 |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7) 나자로의 부활

2017. 5. 1. 12:44성경 공부 /미술과함께-2017

Caravaggio, Resurrezione di Lazzaro, 1609 


사랑하는 이의 시체가 들어있는 관을 붙들고 울어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나자로의 부활> 사건은 결코 아무렇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누구나 장례식에 참석해 본 경험이 있고, 열린 무덤에 흙을 뿌리거나 고인의 재를 묻어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 제가 가장 사랑하는 남편도 언젠가는 저의 장례를 치러주게 될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제가 그의 시신을 수습해야하는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조금씩 죽어가고 있습니다. 시간은 모든 인류를 죽음으로 낙인찍어 놓았고, 우리는 반드시 죽을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죽음의 저주에 묶여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죽음의 폐해를 보셨을 때, 즉, 마리아와 사람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통분히 여기셨을 때를 번역한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은 그의 분노가 어떻게 폭발했었는지를 좀 더 실감나게 전해줍니다. 


마리아도, 마리아와 함께 온 유대인들도 울었다. 그 모습을 보시며, 그 분 안에 깊은 분노가 북받쳐 올랐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를 어디에 두었느냐?“ (...) 예수께서 무덤에 이르셨을 때, 그 분 안에 다시 분노가 북받쳐 올랐다. 무덤은 산허리에 있는 소박한 굴인데, 입구가 돌로 막혀있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돌을 치워라.“ 11장 33-39절 


예수님께서 무덤을 향하여 “나자로야, 나오라!”고 외치셨을 때, 그 동사는 야수가 포효할 때 쓰이는 단어였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친구의 죽음에 초혼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 자체에 선전포고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나자로의 시체 뿐 아니라, 여러분이 사랑했던 아버지, 어머니, 남편, 아내, 아들과 딸의 장례식장, 움직이지 않는 그들의 몸 앞에서 미친 사람처럼 혹은 ‘전쟁을 이끄는 장수가 적진을 향해 고함을 지르듯이’ 소리 지르고 계신 것입니다. 죽음아, 네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살려내어라, 내 사랑하는 사람을! 


그 분의 외침은 이 천년 전 중동 지방의 한 메마른 무덤 앞에만 울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온 인류의 무덤 앞에, 모든 부자와 가난한 자의 무덤 앞에, 폭격 당한 시리아의 작은 마을에도, 세월호와 함께 수장을 치른 진도 앞 바다에도, 그리고 여러분과 저의 장례식장까지 울려 퍼질 외침이었습니다. 


김우진 목사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어떻게 죽음을 개의치 않고 전진 하셨는지를 네 가지의 메타포로 설명해 주셨습니다. 먼저, 그 분은 무덤을 막고 있던 돌을 치우라고 하셨습니다. 썩어가는 냄새를 무시하셨습니다. 시체를 감쌌던 수의와 죽은 자의 얼굴을 덮었던 수건을 치워버리라고 하셨습니다. 


까닭은, 그 분이 실제 우리들의 죽음을 대신하실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부활의 능력은 지금 여러분의 현실을 막고 있는 죽음처럼 단호한 돌과 짙어가는 죽음의 냄새, 그리고 우리 몸을 꽁꽁 묶고 있는 죽음의 옷과 우리 눈 귀를 막고 있는 죽음의 수건을 개의치 말고 “믿으라” 말씀하십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요 11:40) 그는 "우리를 위하여" 죽음을 향해 분노하셨고 포효하셨으며 결국 죽음을 격파하셨습니다. 


나자로의 부활은, 그러한 그리스도의 사역을 이해시키기 위하여 (이재철 목사님의 표현을 빌자면, “양 눈으로 보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디자인 된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장례식이 곧 잔치로 바뀔 것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 분은, 사랑하는 이의 죽음에 대한 슬픔과 죽음에 묶여있는 사람들을 위한 눈물로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또한, 죽음에 대한 맹렬한 분노 그리고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로 타오르셨습니다. 그래서, 나자로를 적진에서 구출해내실 때, 기꺼이 자기 자신을 그 몸값으로 치르셨습니다. 즉, 어떤 면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죽음의 본질 한 가운데로 몰아가실 것임을 이미 느끼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다음 날 마르다가 나자로의 부활을 축하하기 위해 배설한 잔치에서 (요 12장), 모든 사람들이 기쁨과 흥분으로 들떴지만, 정작 그 분은 잠잠히 자신의 죽음을 묵상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마리아가 자신의 장례를 미리 기념해 주어서 위로 받는다고 말씀하십니다.   



PS 

1. 몰타 섬에 구금되어 있다가 시실리로 도망쳐 온 카라바지오에게 Pardi Crociferi 교회는 이 제단화를 주문했다고 합니다. 라자로의 부활에 대한 그 그림은 발견 당시 많이 훼손되어 있었고, 또 교회가 첫 번째 그림을 너무 싫어했기 때문에 카라바지오가 원래 자신의 마음에 드는 원작을 찢어버렸다는 소문을 달고 있습니다. 그 진상을 제대로 알 수는 없어도, 제게 이 그림이 성의 없어 보이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아마도 그것은 그림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대가의 솜씨를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고, 또한 원작자는 실제 모델을 보면서 그림을 그리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 그림은 이전에 그렸던, <마태사도를 부르심 (The Calling of St. Mathew)>과 매우 비슷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리키시는 손가락을 따라서 빛이 비추어 들어오고, 그 빛은 마치 십자가에서 막 내려온 듯, 양 팔을 벌린 나자로에게 환히 비추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얼굴은 어둠에 잠겨있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향한 분노에 일그럴지셨을 그 분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습니다. 다만, 바닥에는 아직 뼈들이 뒹굴고 있습니다. 나자로를 살려내신 그 분은 이제 곧 십자가에 오르실 것이고 못 박혀 죽임 당하실 것입니다. 


2. Tim Keller 목사님의 '나자로의 부활' 사건에 대한 다수의 설교 말씀 (여기 다 실지 못하지만, 구글 검색하시면 쉽게 찾으실 수 있을 거에요^^)과 Randle R. (Rick) Nixon 목사님의 "Not This Time" 설교를  참고했습니다. 


3. http://100church.org/home/board.php?board=cast&category=4 에서 설교 동영상을 직접 보거나 MP3를 내려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