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성경공부 |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9) 아브라함

2017. 5. 22. 14:09성경 공부 /미술과함께-2017


렘브란트 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Abraham and Isaac, 1634 ~1636 


분명 하나님께서는 아들, 이삭을 통해 모든 세상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 아기를 바치라니요? 약속과  명령이 충돌합니다. 이 장면은 아브라함의 인생을 압축하여 보여주는 하이라이트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어떤 사람입니까?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홍수와 바벨탑 이후 등장한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성경은 인류에게 두 번째 시작이 있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대홍수 이후에 살아남은 노아의 후손들이 바로 그 신인류였습니다. 더러운 세상을 물로 깨끗이 쓸어버렸지만, 인간의 죄성은 다시 돋아나 바벨탑과 함께 하늘을 찌르려 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그 반대편에서 인간이 세우는 나라가 아닌,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나라를 시작하셨습니다. 그 분은 하나의 세포, 하나의 인간에서부터 그 나라를 시작하셨습니다. 바로 아브라함이었습니다.  


***


성경은 여호와께서 인신제사를 증오하셨다고 증언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던 그 사건은 코란에서도 가장 중요한 장면 중 하나이고, 이슬람 뿐 아니라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순종'의 상징처럼 여겨집입니다. 그렇다면,아무리 비윤리적이고 잔인한 명령이더라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면 무조건 복종해야 합니까?  그와 같은 논리로 많은 젊은이들이 폭탄을 배에 두른 채 세계 각 처에서 자폭합니다. 이 본문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바는 결코 그러한 순종, 맹목적인 복종이 아니며, '구원'입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이렇게 행할 것을 알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마치 액션 영화에서 의사와 소방수를 대기시켜놓고 촬영을 시작하는 것처럼, 거기엔 천사가 지켜보고 있었으며, 양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만, 주께서는 우리와 같은 후손들을 위하여 이 장면을 연출해 주셨던 것이 아닐까요...? 네, 그 분은 결코 아브라함이 이삭을 찌르는 것을 원치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심지어, 아브라함이 혹시라도 아이에게 칼을 댈까봐,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다급하게 두 번이나 부르십니다, “손 대지 말라, 제발 아무 일도 그 아이에게 하지 말라!” 


그렇다면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일까요? 저는 아브라함과 이삭, 두 사람의 관점으로 이 그림을 보려 합니다. 한 번 아브라함의 시선을 좇아가 보겠습니다. 히브리서 저자의 증언처럼 아브라함 본인도 하나님께서 이삭을 죽이게 놔두시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오히려 본문 곳곳에는 아브라함의 아들 사랑이 녹아있습니다. 아이는 나무를 지고 가지만, 아빠는 칼과 불을 지고 갑니다. 위험한 연장들은 아빠가 지고 갑니다. 그 아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이 걸어가며 묻습니다. “아빠, 여기 불도 있고, 나무도 있는데, 양은 어딨어요?” 고통스러웠을 그 질문에 아버지는 믿음으로 대답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실거야.” 


얼마나 많은 경우, 우리들은 우리 애들에게 이렇게 대답해 주어야만 하는지요. 현실을 찌르는, 천진한 아이들의 질문에, 이 아픈 세상, 죄 된 세상에서 연약한 우리 아빠 엄마들은 이렇게 현실을 살짝 가리며 믿음으로 답해주곤 합니다, “다 괜찮을 거야, 아가야.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으시단다.” 무능한 저는 오늘도 아이들을 위하여 이 기도를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그 곳에 도착했습니다. 지난 3일을 빠른 속도로 달려온 성경의 카메라는 갑자기 슬로우 비디오로 돌아갑니다: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아들을 결박하고, 손을 내밀고, 칼을 잡고.... 


자,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더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당시는 지금과 같이 개인주의적인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한 개인이 집단의 번영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불과 수 십 년 전의 우리 나라, 저의 선배들 역시, 지금 세대보다 훨씬 더 국가와 회사와 학교와 가족과 같이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대한 헌신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살던 씨족 사회에서는 더욱 강하고 고귀한 가치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첫 열매는 신의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속한 집단, 특히 가족을 위해 첫 번으로 거둔 열매를 바쳤습니다. 그것은 사람에게도 해당되어, 첫 아들은 모두의 것이자 신의 것이었습니다. 모든 아들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게되면 그 가족 공동체의 자산과 힘은 약화됩니다. 그래서 큰 아들에게 다 물려주는 대신, 그 장자가 동생들의 가족 모두를 책임지고 이끕니다. 그래서 후일, 하나님께서 이집트를 심판하실 때, 각 가정의 장자를 치십니다. 이집트의 죄악을 큰 아들에게 물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네 유일한 아들, 사랑하는 아들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아브라함이 벌떡 일어날 수 있었던 까닭입니다. 아브라함은 온 세계를 구원할 하나님 나라의 표상입니다. 동시에 그는 세계와 자신에게 역시 어쩔 수 없는 “죄”의 문제를 알고 있었습니다. 세상은 악하며 구원이 절실합니다. 이 때 아브라함은 이 수수께끼 - 이삭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실 것이며, 동시에 이삭을 바쳐야만 하는 현실을 모두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불가능이 없음을 믿고 있습니다. 


***


그렇다면 이삭의 입장을 유추해 보겠습니다. 성경은 이삭의 반항이나 충격을 전혀 묘사하지 않았습니다. 더 나아가, 이삭에게 있어서 이 어린 시절의 경험이 전혀 트라우마가 된 것 같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에는 이삭이 매우 온유한 사람이었다는 증언만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 이재철 목사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설득하는 과정이 생략되었을 것이라고 통찰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강제로 결박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삭의 눈을 들여다보며 진실하게 설득했겠지요. 


화가 렘브란트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1634년부터 10년마다 세 번에 걸쳐 제작된 아브라함과 이삭의 그림과 판화들은, 그의 신앙이 자라면서 성경을 해석하는 눈도 함께 성숙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그가 28세의 젊은 화가로서 출세가도를 달리던 1634년의 그림은 전통적인 기법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천사가 나타나 아브라함의 손을 친히 이끌며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 때, 이삭의 얼굴은 아버지의 손에 억제되어 있지요. 이삭은 아무 것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1645년에 제작된 아래의 그림에서는 분위기가 사뭇 다릅니다. 이재철 목사님의 가르침처럼, 아버지가 아들에게 무언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들의 낯빛은 어둡고 발끝은 낭떠러지에 걸쳐 위태로워 보입니다. 더 이상 뒷걸음질 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로부터 10년 뒤, 1655년에 제작된 동판화에서는 아들의 태도에 많은 변화가 있습니다. 아들의 머리는 아버지의 품에 안겨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전적으로 순종하는 듯, 도살자에게 머리를 기대는 어린 양처럼 무릎을 꿇고 있습니다. 


네... 바로 순종하는 아들이 그 답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통해 세상에 복을 주시면서 동시에 이삭을 속죄 제물로 요구하실 수 있으셨을까요? 그에게는 순종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모리아산에서 아브라함에게 인신제사를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결코 우리들이 우리 아이들에게 칼을 꽂도록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먼 후일, 그 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부자간 가슴 아픈 설득과 대화의 기도가 있었을 때 , 그 아들이 피가 땀에 배어나올 만큼 놀라고 두려워했을 때, 그리고, 골고다에서 나무 위에 결박됐을 때,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울부짖는 그 아들의 심장에, 아버지는 기어히 칼을 꽂으셨습니다. 하나님의 가슴이 찢어졌을 때, 성전 휘장도 함께 찢어졌을 뿐, 아버지의 절규와 고통에 대해서 성경은 우리에게 한 마디도 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값은 온전히 그 분만 치르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너의 유일한 아들도 아끼지 아니하니, 이제 네가 나를 사랑하는 줄 알겠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 고백합니다, "주께서 유일한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셨으니, 이제 저도 하나님께서 저를 사랑하시는 줄 알겠습니다." 


이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녹이고, 이 사랑이 우리의 가슴에 가득 찰 때, 비로소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기쁘게 순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셨던 희생은 전혀 없었습니다. 다만 그 분의 희생을 믿고,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그 말씀을 믿어달라고 하셨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