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성경공부 |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13) 엘엘로헤이스라엘

2017. 6. 19. 19:33성경 공부 /미술과함께-2017

Georges Rouault, Jesus in the Suburb, 1920~1924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에 이르러 성 앞에 그 장막을 치고 (창33:18)

야곱의 인생에서 처음 ‘평안’이라는 단어가 쓰인 곳은  창세기 33장 18절일 것입니다. 태어나던 바로 그 순간부터 형과 경쟁 하였고, 미인을 얻기 위해 젊음을 경주하였으며, 가족을 이룬 후에는 부를 좇아 ‘눈 붙일 겨를 없이 (31:40)’ 일했던 야곱의 청장년기는 21세기 한반도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인생과 매우 닮아있습니다. 우리들 역시 그렇게 달려왔으며, 우리 교회의 20대 30대 청년들의 화두 역시 언제나 이 두 가지입니다: “평생 누구와 살 것인가 (결혼)”; “평생 무엇을 할 것인가 (직업)”

그렇게 달려온 야곱의 인생을, 성경은 너무나 쉬크한, 한 문장으로 언급하십니다,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에 이르러...” 이 문장에는, 그것이 700km가 넘었다는 물리적 거리 외에도 많은 것들이 압축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20년이나 걸리는 이야기였습니다 - 밧단아람으로 떠난 야곱이 돌베개를 하고 잠들었을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 주신 이후, 세겜에서 “엘엘로헤이스라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기까지, 무려 20년의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그간 4명의 부인과 13명의 아이들이 생긴 것도, 결혼지참금을 위해 일했던 14년과, 6년의 뼈를 깎는 고생도, 야반도주도, 그리고 400명의 칼잡이를 거느린 에서와 화해한 일까지, 모두 다 이 문장, “밧단아람에서부터 ... 세겜 성”에 평안히 이르렀다는 문장 안에 들어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에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지금 계신 곳에 이르러, 여러분은 하나님을 어떻게 부르십니까? 프랑스 야수파의 거장, 조르쥬 루오 Georges Rouault의 하나님은 광대와 창녀의 하나님이셨습니다. 루오는 평생 광대, 창녀, 예수, 십자가, 그리고 베로니카의 베일을 그렸던 화가입니다. 그의 작품은 오랜 시간에 걸쳐 완성된 마띠에르와 스테인드글라스를 연상시키는 굵고 짙은 선들, 무엇보다도 그 안에 깃든 뚜렷한 영성 때문에 종교화에 관대하지 않은 미술계에서도 그 가치를 인정받아 왔습니다. 그는 자신의 집 창문으로 파리 거리를 내다보며, 그 위의 가난하고 힘든 삶을 영위하던 군상들의 모습에서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루오는 광대와 창녀들을 그릴 때, 동정이나 연민 없이 어둡고 추악하게 묘사했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고통을 미화하기보다는 고통 한가운데 계신 그리스도를 찾고 있었습니다. (by William Dyrness, Seeing Through the Darkness: Georges Rouault's Vision of Christ) 위의 그림에서도 예수님은 아이들과 함께 빈민가를 걷고 계십니다. 실제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칭하실 때 즐겨 사용하셨던 표현이 바로 “고아와 과부의 하나님”이셨습니다. 당시 사회의 최말단으로 직행하던 처지가 바로 고아-부모의 부재, 그리고 과부-남편의 부재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작은 소자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라’고 간주하십니다. 즉, 우리 주님은 제가 가장 낮고 가난하며 미천할 때 저를 그 분 자신과 동일시 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 분을 "나의 사랑하는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이 고백은 야곱과 저의 고백이었을 뿐 아니라, 십자가 위, 예수님의 외침이기도 하셨습니다.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는 히브리어를 헬라어 방식으로 적은 것입니다.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바크다이“가 원래 발음에 가깝다고 합니다. 즉, 예수님께서도 나무 위에서 엘로이 엘로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시편 22편1절)” 하고 부르짖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비명을 묵살하셨던 까닭은, 벌레 같은 야곱 (사41:14), 바로 저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도 저는 복잡한 심경으로 - 놀라움과 고통과 사랑으로 - 이 호칭을 되뇌어 봅니다. 하나님, 나의 사랑하는 하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