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성경공부 |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18) 모세 2

2017. 9. 25. 15:51성경 공부 /미술과함께-2017

Vincent van Gogh, Shoes, 1883

하이데거는 고흐가 그린 구두를 보면서 시골 아낙네를 떠올렸다고 합니다. 헤어진 구두를 보면, 그 구두를 신었을 사람이 생각나지요 - 그가 걸었을 산 길이나 논두렁, 구두가 닳도록 걷고 걸었을 그 시간들이 떠오릅니다. 

Rene Magritte, Red Model, 1934 

분명 마그리트도 고흐의 구두를 생각하며 이 "붉은 모델"이라는 이름의 작품을 그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뉘앙스가 다르지요. 일단, 노골적으로 그 신발이 담았을 발을 그려 넣었습니다. 예민한 관객이라면, 저 발로 그 거친 땅을 밟을 때의 통증이 느껴질 것 같습니다. 땅 바닥에는 동전 몇 닢과 함께 담배에 불을 붙이고 던져버린 듯한 성냥들이 널려져 있습니다. 화면 오른 쪽 구석에 버려진 종잇조각은 신문이나 잡지의 일부인 듯한데, 어렴풋이 한 모델의 사진이 흑백으로 보입니다. 이 구두의 주인이라는 단서일까요? 이렇듯 기묘한 그림의 소재들과 상관없이, 배경이 된 흙이나 나무판자들은 지극히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마그리트의 그림들은 마치 시치미 뚝 떼고 던지는 농담 같습니다. 무표정으로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면서 사실적으로 묘사하는데, 끝에 알고 보면 농담인, 그것도 뼈있는 농담을 던지는, 그런 류 말입니다. 정교하게 사실적으로 묘사한 발의 피부와 헤어진 구두의 가죽, 그리고 벽을 장식하는 나무의 결까지. 너무나 현실적인데 생경한. 그의 그림들은 그래서 ‘초현실주의’ 입니다. 현실적인데 절대 현실이 아닙니다. 

Rene Magritte, Not to be Reproduced, 1937

마그리트는 전혀 어울리지 않거나 있을 수 없는 개념을 포개어 그려서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말도 안 되는 묘사가 실은 그 사물의 본질에 더 가깝게 떠오르게끔 만들었던 벨기에의 화가입니다. 그의 기법을 “데페이즈망(dépaysement)”이라고 부릅니다. 함께 있을 수 없는 성질을 나란히 배치하거나, 안에 있어야 할 것들을 밖으로, 밖에 있어야 할 것들을 안으로 배치하는 그림을 그려서, 인간의 고정된 시각을 공격하고 세상의 진정한 본질을 생각하도록 만드는 기법입니다.

***

불붙은 떨기나무는 모세를 위한 하나님의 더페이즈망이었습니다. 불이 붙자마자 금새 사그라들어야 할 가시덤불인데 계속 살아있는 모습이 너무 신기하여 모세는 가까이 다가갑니다.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출3:3)” 

분명 오라고 부르시는 장면이었겠지만, 모세의 출입은 금지당합니다. “STOP.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왜냐하면, 그 분은 소멸하시는 불 (신4:24),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타버릴 것입니다.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출3:5)” 

왜 신을 벗으라고 하셨을까요? 이 구절에 대하여, 이재철 목사님께서는 마치 고흐의 작품을 감상하시듯 아름답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일단, 구두는 인간이 지니는 물건들 중에 전 무게를 감당하는 소품입니다. 옷도 걸치고 가방도 들지만, 구두는 자신이 우리의 모든 무게를 받쳐줍니다. 게다가 구두는 벗어도 그 형체가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 발 모습을 온전히 간직합니다. 그리고 내가 신은 구두의 위치는 지금 나의 위치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돌아가신 분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구두를 보면 더욱 눈물이 납니다. 마치 좌표처럼, 구두를 벗어두신 그 곳에 못 박힌 망자의 죽음과 그 구두를 딛고 서 계셨던 그 분의 존재가 없다는 사실이 다른 어떤 소지품보다 남아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신을 벗으라고 요구하셨던 것은, '네가 붙들고 있는 너의 모든 것을 벗으라'는 말씀이셨습니다. 이미, 모세가 붙들고 있던 것들은 - 젊음, 육체, 빛나는 지성과 언변, 정의감, 꿈... 아, 그 꿈 - 하나님과 민족을 위한 것이라고 믿었던 그 꿈은 진즉 가시덤불처럼 말라버린 터입니다. 모세야말로 불타버려야 하는 가시덤불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더페이즈망은 모세라는 인물이었습니다. 불타서 없어져야 옳은데 아직도 살아있는 가시덤불 - 태어났을 때 죽었어야 했고, 나일강에 던져졌을 때 죽었어야 했으며, 그 감독관을 죽였을 때 애굽왕에게 처형당해야 옳았을 그가 미디안 광야에서조차 40년을 더 살아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힘이 다 빠질 때까지 (즉 순순히 신을 벗기까지) 기다리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소멸하시는 불 앞에서 모세는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모세를 부르고 계신 분은 제 2위 하나님, 우리를 대속하실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모세를 대속하시고, 이스라엘 민족을 대속하시며, 수 천 년 후, 우리를 대속하기 위하여, 그 분 자신이 소멸되실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과 대화를 이어나갑니다. 심지어 찡찡거리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의 불에 소멸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 또한 그렇지 않습니까. 진즉 소멸되었어야 옳을 저의 통장, 저의 결혼 생활, 저의 삶 자체가 하루 하루 기적 같습니다. 혹시, 이 글을 읽고 계신 분들 중에서 자신의 힘으로 직장을 다니고 돈을 모으며 생활을 영위하고 가정을 지킨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그 힘이 빠지기를 기다리고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비로소 쉬시기를 기원합니다. 혹시 오늘 하루도 가시덤불 같은 본인이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기쁨을 경험하고 있는 분이 계십니까. 여러분 주변의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길 것입니다. “어찌하여 이 사람은 이렇게 희생적으로 내어주어도, 이렇게 정직해도, 이렇게 공의를 추구해도 소멸되지 않을까.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그 존재만으로도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