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성경공부 |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20) 모세 3

2017. 10. 14. 23:44성경 공부 /미술과함께-2017

Michelangelo Buonarroti, Moses (at the tomb for Julius II) 

한 민족을 물도 없는 광야로 이끌어 나온 지도자라면, 미친 사람일 것입니다. 적어도 1년치 군량미는 확보하고, 미리 주변 국가들과 합의하여 정확한 이동 경로와 스케쥴을 가지고 움직인다 해도, 보통 사람의 자신감으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너무 위험한, 아니 불가능한 일입니다. 

저는 모세를 따라 나선 사람들이 불평을 쏟아내는 모습이 당연한 것 같습니다. 하루만 물을 마시지 못해도 노약자들에게는 치명적인데 지도자가 어디로 가는지도 잘 모르고 아무 대책도 내놓지 못한다면 너무 두려울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이 완벽한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지도자를 원망하기 마련입니다. 모세는 얼마나 많은 질타와 원망과 분노를 견뎌야 했을까요... 

그러나, 성경은 그가 세상 누구보다도 온유한 사람이었다고 평가합니다. (민12:3) 그의 카리스마는 스스로의 능력이나 자신감에서 온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재철 목사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에게 '주어'는 오직 하나님이었고 그의 역할은 '동사'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광야로 이끌어내고 바다로 인도하는 미친 짓을 행했고, 그가 가는 길에는 언제나 기적이 따랐습니다. 광야에서도 그는 수원을 찾아다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물이 그를 따라 다니는 것처럼 보입니다. 다른 나라 지도자들의 눈에 그는 아마도 정신 나간 리더였을 것입니다. 실제 그의 동족들은 여러 번 그를 죽이려 했지만 어떠한 탄핵이나 쿠테타도 그를 끌어내릴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주어진 리더쉽을 다 발휘하고 120세에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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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가 모세 상을 처음 완성하였을 때, 사람들의 평은 "무섭고 두렵다" 였습니다. 마치 다윗이 골리앗을 노려보듯, 미간을 찌푸린 채 어딘가를 노려보고 있는 이 웅장한 노선지자의 상은 한 손에 율법이 새겨진 돌판을 들고 있는데 그 손과 팔에 힘줄이 불끈 솟아있습니다. 어깨와 팔의 각도는 이 돌판을 소중하게 꼭 붙들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다비드 상에서 보여주었던 팽팽한 긴장감이 모세 상에서도 느껴집니다. 다만 노선지자의 길고 우아한 수염만 다비드 상의 젊은 근육처럼 출렁이고 있을 뿐입니다.

모세의 머리에 뿔이 있는 까닭은 당시 사람들이 출애굽기 34장 29절을 오역했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자기 손에 들고 시내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씀하였음을 인하여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여기서 "광채가 난다"는 히브리어가 (발음: 카란) "뿔"이란 단어로 (발음: 케렌) 잘못 해석되었습니다. 그래서 재미있게도, 뿔이 모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고 합니다. 

비록 오역이었지만, 미켈란젤로의 모세 상에서 뿔은 그 두렵고 엄위한 카리스마에 일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의 얼굴에서 나오는 광채를 두려워했기 때문에,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녔다고 하지요. 그러나, 후일 바울 사도의 관점은 더 깊이 들어갑니다,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것 같이 아니하노라" (고후3:13) 이 구절을 읽을 때면, 모세와 같은 신앙의 대선배조차 감당하기 힘들었을 리더쉽과 책임감의 노고가 확 밀려오는 것 같습니다. 어느 지점에 이르면, 세상의 지도자들에게 두려운 것은 카리스마의 퇴색인 것입니다. 

결국, 그는 두려운 정죄의 '율법'이 상징하는 구약의 리더였습니다. 그러나 그 율법이 궁극적으로 가리키고 있던 '신약의 리더'는 두려운 정죄로 우리를 이끌지 않으셨습니다. 모세가 백성들에게 분노하며 지팡이로 돌을 두 번 내리쳤을 때, 하나님께서 "나는 너와 다르다"고 명확히 선을 그으셨던 까닭도 그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를 약속의 땅으로 데리고 가실 궁극의 지도자는, 그 백성의 패역에 분노하지 않기로 결심하셨습니다. 다만 본인이 깨어져 생수 같은 보혈을 쏟아내셨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가나안을 밟을 수 없었습니다. 그의 소명은 거기까지였고, 하나님께서는 모든 백성들 앞에서 공의를 명확히 하셨습니다. 그러나, 신명기 34장 1절에서 3절은, 하나님께서 모세가 죽기 직전, 그가 그토록 소원했던 가나안 땅을 파노라마처럼 펼쳐 보여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마치 감기에 걸린 어린 아기가 밖에 나가 놀자고 떼 쓸 때, 엄마가 칭얼거리는 아기를 안고 베란다에서 창 밖을 보여주면서, "저 자동차를 봐봐. 저 사람들을 봐봐. 우리 감기 나으면 같이 나가서 놀자." 라고 달래주듯이, 제게는 이 장면이 마치, 하나님께서 모세를 안고 하늘을 날아 가나안의 구석 구석을 보여주고 계시는 것 같습다. 비록 지금 너의 육신은 이 땅에 들어갈 수 없지만, 너의 노고로 인하여 후손들에게는 이 약속의 땅이 주어질 것이다... 라고 위로해 주시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먼 후일, 우리들의 궁극적인 리더,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나안의 변화산에서 기도하고 계셨을 때, 그 곳에 모세도 함께 있어 진정한 가나안의 약속을 우리 주님과 함께 상의합니다. (눅9:30) 육체의 죽음은 끝이 아니며,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차원은 마치 하늘이 땅에서 멀 듯이 그렇게 높으실 것입니다. 

하늘의 약속을 바라보고 주어진 책임에 노고를 다 하는 모든 리더들 - 가장들에게, 구역장님들에게, 교구 목사님들에게 그리고 담임 목사님들에게, 이 장면이 위로와 소망되기를 바랍니다. 혹시 나의 세대에서 그토록 갈망했던 부흥을 보지 못할 지라도, 그 분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은 나의 기대를 뛰어넘을 것입니다. 지금 당하고 있는 원망과 오해와 분노와 음해는 잠깐 지나가는 그림자일 뿐이며, 그 분의 약속은 영원히 견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