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성경공부 |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22) 요나

2017. 10. 30. 13:52성경 공부 /미술과함께-2017

Jewish Museum on 5th Ave & 92nd St. NY, NY (from Google Map) 

1. 유대인 박물관 안으로 한 발자국 들어섰을 때, 천장을 가로지른 글에 놀란 적이 있습니다, (기억을 의존하여 옮긴다면)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선택하신 민족이다.” 

나에게도 소중한 하나님이신데, 그 민족만을 선택하셨다니. 그런데, 그 글이 주는 충격은 다른 대자보나 캐치프레이즈와는 다른, 무언가 폭풍우처럼 거센 에너지가 있었습니다. 어떤 자부심, 마치 면전에서 깔아뭉개는 듯 강한 자부심과 동시에 배타성을 함께 마주친 것 같았습니다. 그것은 제가 2002년 외국에 머물던 당시, 신문에서 광화문 광장을 가득 메운 붉은 인파의 사진을 보았을 때 느꼈던 감정과 비슷한 면이 있었습니다.  

 오마이뉴스 이종호 기자, 2006년6월14일 

2. 그러나 반대 급부로 비슷한 느낌이었습니다. 제가 상대방을 깔아뭉개는 쾌감에 더 가까운 느낌이었습니다. 저는 그 사진이 주는 시각적인 충격이 너무 인상적이어서, 당시 수강하던‘Visual Culture' 선생님께도 보여드렸습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다소 자랑스러운 마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교수님의 반응은 뜻밖이었습니다. 

“나는 이런 사진을 보면 무서워요.” 

저는 놀라서 이유를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조금 미안한 표정으로 이렇게 답해주셨습니다. 

"이렇게 전체적인 이데올로기가 무서워요. 이 많은 사람들이 한 가지 자부심으로 움직이는 모습이... 왠지... 다른 민족이나 인종들을 해칠 수 있는 데까지도 갈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저는 뻘쭘히 되돌아 나왔지만, 솔직하게 말씀해주셨던 것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습니다. 

3. 최근 한국의 뉴스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이영학’이라는 사람의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의 죄악은 기부금을 보낸 수많은 사람들의 선의를 농락했고, 어린 딸의 친구를 욕보인 후 결국 죽였으며, 그의 아내와 아버지를 자살로 몰고, 친딸의 인격에도 지우기 힘든 악한 경험을 심었습니다. 그리고, 엊그제 뉴스는 죽임 당한 어린 소녀의 부모들이 이영학의 딸도 함께 구속해달라는 요청을 했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만약 법원에서 이영학씨가 ‘잘못했다’고 말하였으니 용서하고 석방하겠다고 판결 내린다면 살해된 소녀의 부모는 어떻게 될까요? 그 판결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아마도 그 판사에게 “심히 싫어하고 노할” 것이며, 사람들은 그의 분노가 합당하다고 - “성내어 죽기까지 합당하다”고 할 것입니다. 

4. 우리는 요나 선지자를 무시하기 쉽습니다. 선지자 본인이 그렇게 여기기 쉽도록 요나서를 구성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가 과연 어떤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을 그렇게 반발했는지 살펴본다면 그를 좀 더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4장 초반부에 명확하게 나와 있습니다.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선지자가 자기 생명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그의 민족이었고, 앗수르에 내려져야만 했던 공의였습니다. 앗수르는 이스라엘 뿐 아니라 주변 국가를 잔혹하게 짓밟았던, 역사상 최초의 다민족 국가였습니다. 단순히 강간과 살인이 아니라, 해골의 탑을 쌓고, 포로들의 코에 구멍을 뚫어 끌고 가 눈을 뽑았으며, 어린 아이들의 발목을 잡아 바위에 내리쳐 죽였다고 합니다. 그 죄악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갚아주셔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요나 선지자에게 니느웨에 가서 멸망을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만약 니느웨를 심판하실 작정이시라면 그냥 멸망시키면 되지, 자신을 보내실 리가 없다는 것을 요나 선지자는 알고 있었습니다. 선지자가 쓰지 않으셨지만, 이미 여러 차례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충분한 커뮤니케이션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은 4장 2절입니다, “제가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아아, 당신은 너무 너무 견딜 수 없이 자비로우십니다!!!” 

이성유 목사님께서 잘 표현해 주셨던 것처럼, 공의를 부르짖는 선지자를 향한 하나님의 응답은 부드럽습니다, “네가 그렇게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맞다. 그것은 공분이다... 그러나, 이어서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너는 하루 있다가 지는 식물 한 그루만 없어져도, 그렇게 죽을 것처럼 뜨거우냐. 그렇다면, 이 큰 성읍, 이 많은 사람들로 인하여 나의 마음은 얼마나 뜨겁겠느냐. 이들이 없어질 것을 생각하면 나는 죽을 것처럼 괴롭다. 지금 내 마음이 내 안에서 돌아서, 내 긍휼이 온통 불붙는 것 같다. (호11:8 참고) 

어떤 사람도 자신의 잘못을 이렇게 오래도록 기록에 남기고 싶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선지자에게는 한 마디의 변명도 없습니다. 이스라엘과 그 주변 국가들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슬픔과 분노와 공의의 심판이 가득한 다른 선지서들 사이에서 요나서는 낯설게 끼어있는 대가의 일필휘지 같습니다. 요나는 다른 누구보다도 먼저 복음이 유대인이라는 어떤 민족 하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온 세계와 세대를 아울러 모든 민족을 향하시리란 것을 깨달았던 대 선지자 입니다. "무릇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요나 2장 8-9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