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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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정원 | 가을도 떠나고 있다 (엄마는 여행중)
뉴질랜드의 큰이모가 무작정 비행기 티켓을 보내주셔서 황급히 떠난 엄마의 해외 여행. 엄마는 집안 곳곳 "난방을 끄라" 와 같은 메모를 붙여두시거나, 간장게장이나 홍시 등의 저장식품을 남겨두셨지만, 아빠의 외로움은 다른 여느 때보다도 짙어 보인다. 우리 집 살림과 아빠 집 살림, 둘 사이에서 고민하던 나는 공평하고 속편하게 모두 안 하기로 했다. 하루 한 번 저녁 식사만 챙겨드리는데, 그것도 아빠가 퇴근 때 외식을 하시거나 우리 부부와 함께 저녁을 드실 수도 있기 때문에 가장 간소 버전으로 준비한다. 그래서, 매일 한 번 마실가는 기분으로 아빠 집을 향해 산책하던 길, 익어있는 가을 열매가 너무 예뻐서 찰칵. 어쩌면 이렇게 미세먼지 가득한 하늘 아래 이토록 선명하게 붉은 과실을 맺는 걸까. 이 붉은 색이 ..
2016.11.23 -
엄마의 정원 | 미니 김장
결국, 엄마가 강화도에 가신게 문제였다. 평화롭던 수요일 오후, 엄마로부터 전화벨이 울렸다. 구역식구들과 강화도 풍물시장에 다녀오신다길래, 순무김치를 부탁드렸는데, 엄마는 나보고 수레를 갖고 지하주차장에 내려오라는 것이다. 도대체 얼마나 사셨을까. 호기심으로 내려가보니, 정말 수레가 필요하다. "한 상자에 만원인데 안 살 수가 없었어." 고구마, 무, 파, 무청, 콩, 고추 순무김치 등등 싱싱한 야채들을 한 아름 실어 오셨다. 졸지에 미니 김장을 하게됐다. 그러나 파를 다듬으시는 엄마를 뒤로하고 나는 선약되어있던 장소로 떠나야만했다. 그 날 엄마는 자정까지 야채들을 다듬으셨다고 한다. 그래서 아침 일찍 엄마네 집으로 갔을 때, 거실은 김장모드였다: 바닥은 신문지로 무장되어있었고, 집의 모든 대야들은 출동..
2016.11.07 -
결혼 | 부동산
나는 우리 집을 매우 사랑한다.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남편과 사귈 때, 나를 집 앞까지 데려다주던 그는 돌아가기 전 놀이터에서 그네를 밀어주면서 나의 등 뒤에 부끄러운 듯 이렇게 말했었다. "모아둔 돈은 OOO에요. 연금보험을 깨뜨리면 OOO을 더할 수 있어요. 그래도 집을 마련하기에는 턱 없이 부족하지요." 당시 나는 결혼을 생각하고있지 않았었다. 그러나 그 돈은 회사의 부도 위기와 급여 연체에 시달리던 나에게는 무척 큰 액수였고, 눈물이 핑 돌았다 - 이 남자는 내가 무엇이관대 자신의 모든 것을 주려고 할까. 그리고 결혼을 결심한 뒤, 그가 여느 때처럼 집 앞까지 데려다주던 어느 날 저녁 나는 놀이터에서 한 번 더 눈물을 터뜨렸었다. 회사와 집의 사정 상 혼수를 준비하기가 너무 ..
2016.11.04 -
엄마의 정원 | 도라지
아빠가 5년 전 할머니 산소에 성묘가셔서 캐오신 야생 도라지가 엄마의 11층 아파트 창가에서도 계속 그 황홀한 보라빛 꽃을 피우고 있다. 밖으로 나가고 싶어하는 개구쟁이 꼬마가 코를 창에 박고 바깥 세상을 동경하듯이, 꽃도 그 여린 얼굴을 유리창에 박고있다. 창 밖은 오직 외곽순환도로이고 자동차들이고 미세먼지일 뿐인데도. 그녀가 살던 그 깊은 숲 속, 비밀스런 햇살과 바람이 찾아오던 그 곳의 흙을 그리워하듯이.
2016.11.03 -
엄마의 정원 | 고구마 2
엄마가 그저 물에 담가두셨을 뿐인데, 엄마가 하신 일은 그것밖에 없는 것 같은데, 고구마가 식탁을 점령해버렸다. 모두가 잠든 밤에 토토로가 몰래 와서 고구마에게 마법을 건 것일까. 자신이 라푼젤인듯 그 잎사귀를 치렁치렁 늘어뜨리고 마법같은 생명력을 뽐내는 중이다. 엄마의 손길과 눈길 아래에서는 고구마 한 알도 행복해지나보다.
2016.11.02 -
나의 사랑하는 책 | 숨결이 바람될 때
남편의 중성지방 수치가 1480, LDL은 450, HDL은 20이란 검사결과를 받았을 때, 이 책이 읽고싶어졌다. "어떻게 하면 건강을 되돌릴 수 있을까?" 남편은 해맑은 얼굴로 건강한 듯 회사에 다니고 운동을 하지만, 이 수치는 사실 오늘 당장 그가 심장발작을 일으킨다거나 뇌졸증으로 쓰러진다해도 이상하지 않은 팩트이다. 화창한 가을 햇살 아래, 나는 그가 가져다준 보험증서들을 베개삼아 편안하게 소파에 누워서 이 책을 한 달음에 읽었다. 책의 저자인 폴 칼라니티는 레지던트 마지막 해 자신의 폐암을 발견하고, 투병과 함께 이 책을 집필했으며, 완성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았다고 한다. 죽음 이후, 그의 책은 딸과 함께 세상에 남은 아내 루시가 마무리하여 출간했다. 책의 제목은 아래의 시에서 따온 것이다. 당..
2016.10.27 -
엄마의 정원 | 고구마
엄마가 싹 튼 고구마를 물에 담가두신 지 며칠 되지 않아 사진처럼 무성해졌다. 엄마는 무엇이든 이렇게 키워내셨다: 우리 집이 아무리 어려운 시절을 지날 때도 엄마의 식탁은 언제나 마법처럼 풍요롭고 건강했으며 (그래서 사위를 단숨에 12kg이나 찌워내셨다), 엄마의 화단은 꽃들이 지지 않았고, 엄마 곁에는 늘 선물을 주고 받는 친구들이 끊이지 않는다. 심지어 생활비가 끊겨도 엄마의 지갑은 하나님께서 채워주셨다. 가끔 엄마는 아빠의 사업이 어려워 억울한 채근을 당하셨는데, 엄마의 눈물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다른 어느 때보다 신속했던 것 같다. 그래서 엄마에게는 조용하고 겸손하지만 확실한 "삶"에 대한 자신감과 "죽음"에 대한 자신감이 있다. 그 분의 딸인 나로서는 엄청난 복이다.
2016.10.25 -
나의 사랑하는 책 | 한강의 "희랍어시간"
그 후 초등학교에 다니면서부터 그녀는 일기장 뒤쪽에 단어들을 적기 시작했다. 목적도, 맥락도 없이 그저 인상 깊다고 느낀 낱말들이었는데, 그중 그녀가 가장 아꼈던 것은 ‘숲’이었다. 옛날의 탑을 닮은 조형적인 글자였다. ‘ㅍ’은 기단, ‘ㅜ’는 탑신, ‘ㅅ’은 탑의 상단, ㅅ-ㅜ-ㅍ 이라고 발음할 때 먼저 입술이 오므라들고, 그 다음으로 바람이 천천히, 조심스럽게 새어나오는 느낌을 그녀는 좋아했다. 그리고는 닫히는 입술. 침묵으로 완성되는 말. 발음과 뜻, 형상이 모두 정적에 둘러싸인 그 단어에 이끌려 그녀는 썼다. 숲. 숲. 한강 작가의 ‘희랍어시간’을 읽으며, 뉴욕 매니스음대에서 성악 과정을 밟던, 친한 언니가 해 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언니는 나의 발음을 분석하셨다. “너는 성대를 완전히 닫아서 소..
2016.09.13 -
밤산책
날씨가 무덥다. 입추 지나면, 광복절 지나면, 한 풀 꺾인다고 엄마가 말씀하셨는데, 정말로 지구 위의 얼음들은 녹고 있을까. 저혈압에 포도주를 써보라 하여, 한 모금 물었더니 걸을 힘이 났다. 아파트 없이 하늘을 찍어보았다. 저 빛나는 것은 별일까,인공위성이겠지. 방금 뺨에 닿은 물방울은 소낙비의 시작일까, 실외기에 맺혔던 H2O겠지. 가로등이 보름달처럼 아름다웠다. 나의 머리 위를 가로질러 날라가던 비행기의 깜빡거림도 내 곁을 스쳐 지나가던 블레이드의 형광 빛줄기도 낮의 더위를 피해 놀러 나온 아이들의 소란함 속에서 내 한 발자국 앞을 조심스레 앞서 가던 자동차의 붉은 브레이크등도. 살갗이 간지럽다. 모기도 없이 잘 관리된 아파트 단지에서 산책을 마치면, 항히스타민을 먹어야겠다. 몸 밖의 것들을 대함에..
2016.08.18 -
내 영혼의 진통제
티비, 팟캐스트, 카카오톡은 스테로이드나 타이레놀 같다. 현실의 지리멸렬함을 달래고 일상의 고통을 뚫어 하루하루 이어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부작용과 금단현상이 생기듯 행여 내가 그들의 소음 없이 시간을 독대하는 시도라도 할까봐, 내 영혼은 후유증을 아우성친다. 중독, 게다가 내성. 처음엔 이토록 황홀하고 행복하며 유용한 것이 있었을까 싶었던 매스미디어와 SNS가 이제는 감흥 없이도 내 손 끝의 습관이 되어버렸다. 오늘의 고통은 위로하지만, 내일의 고통 또한 어김 없이 다시 찾아올 것이다. 그러나 스테로이드와 진통제는 좋은 약이다. 내 몸이 가진 (주님께서 주신) 자가 치유 기능이 결국 병을 이길 때까지, 시간을 벌어주고 견딜 수 있도록 도울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팟캐스트를 통해 들리는 메시지..
2016.0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