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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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정원 | 건망증
월요일 아침엔 늘 전 날의 성경공부를 올리고 주말 동안 밀린 집안 일을 하는데, 언제나 엄마가 전화를 하신다. "뭐하니?" 대개는 점심을 함께 먹자는 요청이신데, 애시당초의 용건과는 상관 없이 주말의 간략한 업데이트와 상황보고는 필수 과정이다. 그리고 늘 따라오는 엄마의 반응, "근데, 내가 왜 전화했지?" 그럼 나도 도우려 애쓴다, "엄마, 어떤 카테고리였어요? 먹는거? 교회? 아빠?" 그럼 엄마는 막 웃으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 이름을 부르는 동안 왜 전화했는지 잊어버렸어." 그럼, 나도 막 우습다. 예전에 - 그러니까 내가 훨씬 더 어리고 나의 뇌가 젊었을 때에는 엄마의 이러한 습관적인 건망증이 두려웠다. 왜 인간의 뇌는 이렇게 연약한걸까. 이러다가 치매에 걸리면 어떡하나. 그러나 지금은 나도..
2018.10.15 -
NY, NY | Tribute in Light 빛 속의 추모사
This file is licensed under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Share Alike 4.0 International license2001년 9월 11일 아침, 맨해튼 34번가의 작은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하던 저는 귀를 의심했습니다. 지각을 한 직원이 말하기를, 월스트릿부터 걸어왔으며 쌍둥이빌딩에 매달린 사람들이 결국 손을 놓고 뛰어내리는 것을 보았다고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라디오에서는 부시대통령의 목소리가 불안하게 울렸습니다, “자유에의 침공...” 제가 있던 미드타운까지 매캐한 냄새가 풍겼고 휴대전화는 불통이었으며 모든 공공교통은 멈췄습니다. 맨해튼을 빠져 나가기 위하여, 브롱스로 퀸즈로 뉴저지로 브룩클린으로.... 섬과 이어진 다리들은 걸어서 집으로 돌..
2017.11.13 -
엄마의 정원 | 호박
내가 아프단 사실을 알자마자 엄마는 계속 음식을 보내기 시작하셨다. 아플 땐 고기를 먹어야 한다며 소고기 미역국을 냄비 채 통째로 보내셨고, 야채, 생선조림, 표고버섯전, 김치찜, 곤드레나물밥, 배, 오렌지, 매실액기스 등을 끊임 없이 갖다주셨다. 너무 달고 큰 무가 하나에 1900원 밖에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감격하셔서, 밤 새 깍두기를 담으시고 나와 며느리와 이모들과 할머니께 나르시느라 온 몸이 아프다 하시면서도. 오늘 아침도 찬란한 햇빛이 거실에 쏟아지는데, 어제 저녁 엄마가 갓 지어 갖다주신 찰진 흑미밥을 한 그릇 데워서 천천히 음미하며 먹었다. 아침 햇살처럼 당연한 엄마의 사랑... 이 사랑 없이 나는 어떻게 살 수 있을까. 주의 성실하심이 크도소이다... 주의 말씀 없이 나는 어떻게 살 수 있..
2017.10.20 -
결혼 | 그대라는 기적
"어떻게 나에게 그대라는 행운이 온 것일까..." 아이유, 밤편지, 2017 어제 밤, 침대 위에서 무심코 몸을 돌려 팔을 뻗으니, 마침 함께 누워있던 남편의 손 근처였다. 나의 손이 닿자, 남편은 그 손을 잡아주었는데,다정했다. 그 때, 기도 드렸다. 이것이면 충분합니다, 주님. *** 내가 어떤 죄인인지는, 주님과 나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나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 그러니까 어느 날 문득 나를 존귀하게 보아주고, 내가 하는 말들을 경이롭게 들어주며, 나를 아름답다고 감탄해 주었을 때 - 교만한 나는 (사랑을 믿지 않았고, 인간의 사랑은 반드시 바랜다고 생각했으며, 결혼할 마음이 전혀 없었던 나는) 그를 별로 탐탁히 여기지 않았었다. 그가 자신의 모든 것을 나에게 주고 싶어하고, 남은 시간을 함..
2017.07.26 -
우리 교회
우리 교회는 양화진 선교사 묘원에 있다. 초창기에는 지금의 선교기념관 건물에서 오후 예배 한 번만 드렸는데, 예배를 마치고 나오면 아름다운 공원 곳곳에 시원한 냉커피 주전자가 놓여있는 모습이 특이하고 재미있었다. 묘원의 비석을 하나하나 읽노라면 내 또래 젊었던 선교사님들께서 당시엔 미개했던 땅의 끝, 말이 안 통할 뿐 아니라 위생 시설 역시 말도 안 되었던, 방의 크기가 키에 맞지 않아 잠 잘 때조차 몸을 다 펼 수 없던, 이 멀고 먼 곳까지 오셔서 그 복음을 전하셨다는 사실이 눈물 겹게 감사했다. 그 분들을 통해 이 땅에 온 복음이 지금 내게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이 되었다. 어제 밤 7차 공청회에서 미래준비위원회 중 한 분이 "생계를 희생하며 일했다" 하셔서 몹시 감사했다. 이 교회가 울타리 되어 주..
2017.04.25 -
Road FC 038 격투기 관람기
남편의 옛날 운동선생님이 출전하신다는 것 외 다른 아무 정보 없이, 정말 딱 보기에도 운동과는 거리가 멀어보이는 우리 부부가 오직 선생님을 응원하려는 일념으로 온 낯선 이곳, 장충체육관. 본경기가 무엇이고 영건즈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어리버리 3시간 일찍 온 바람에, 신인들의 데뷰전부터 경기를 보기 시작하여 거의 4시간을 관람했다. 운동하는 사람들이 오는 곳이라 그런지 들어올 때 홍보차 구운 달걀을 줬고 가장 큰 광고판은 축협이었으며 편의점에서도 육포가 가장 상석에 있었다. 이 생경한 분위기. 나는 선수들의 펀치보다 사회자의 발성에 더 감동을 받는 종류의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곧 격투기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제일 먼저 내 눈에 띈 것은 커다란 스크린의 좋은 화질과 스피커에서 울려나오는 훌륭한 음질, 그..
2017.04.15 -
아줌마
남편의 바램으로 시작했던 20대 청년 구역장이었지만, 실제 청년들을 만났을 때는 너무 사랑스러워서 나 스스로도 놀랐었다. 수 십 년 전이었다면 엄마 뻘이었을 나는 아이들을 존댓말로 대했다. 진심으로 존대해주고 싶었기 때문이었고, 한 편으로는 소중했기 때문이었다. 신문을 장식하는 그 이상한 젊은 아이들은 다 어디 있는 걸까. 모두 반듯하고 예의바르고 아름답고 대견했다. 교회에 오는 아이들이기 때문에 착한걸까. 물론 시간 관념이나 약속에 대한 책임감은 덜하다고 들어서 알고 있었는데, 그것도 곧 아이들이 나를 어려워하는 부분이 크기 때문이란 것을 느꼈다. 나만 몰랐었는데, 나는 그들에게 '어른'이었다. 구역 식구들 중 한 청년이 우리 집을 단편영화의 로케이션으로 사용할 수 있는지 부탁해왔다. 5분짜리 과제였기..
2017.03.31 -
희귀암. 수선화.
희귀암 말기. 어머니를 간호하는 친구는 날로 초췌하여 가지만, 그의 두 어린 딸은 이 수선화처럼, 봄처럼, 병원 복도에서도 환하게 빛났다. 꽃을 좋아하시던, 내 친구의 어머니께 위로가 될까 하여 들고 간 수선화였지만, 내규 상 병실로 가져가지 못하여 어쩔 수 없이 우리 집 창가에 잠시 머물게 되었는데, 밤 사이 이렇게 꽃망울이 터졌다. 외롭고 고된 전투를 치르는, 친구의 어머니 손을 잡고, 부풀어오른 배를 잡고, 눈물 흘리며 기도해주던 남편이 정말 고마웠다. 어머니 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가는 길, 연약하고 덧 없는 우리 모두가 결국 마주하게 될 그 죽음의 순간에도, 주님 - 친구 나자로의 무덤 앞에서 포효하시던, 십자가 위에서 죽음과 싸우셨던, 나의 주님께서 함께 해 주실 것을 믿어서, 나는 병색 완..
2017.03.20 -
NY NY | 뉴욕에서 만난 사람들 - Tom and Pip
톰은 바클레이 은행의 중역이었고, 네 명의 아이들을 키우는 아빠였다. 매 주 수요일 아침 7시, 나는 엄청난 출근 인파를 뚫고 그랜드센트럴 앞 작은 카페에 가서 톰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가 한국어를 배우는 이유는 입양한 네 명의 한국 아이들 때문이었다. 십 년 후, 온 가족이 한국을 여행할 계획인데, 그 때 한국어로 음식을 주문할 것이라는 야심을 갖고 있었다.톰과 그 아내 핍은 신실한 카톨릭 신자였고, 늦은 결혼을 하자마자 입양을 택했다. 처음엔 한 명이었지만, 그 아이가 외로울까봐 한 명을 더 입양하고, 또 딸이 있었으면 좋겠어서 한 명을 더 입양하고... 그러다가 네 명이나 입양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핍은 유엔을 그만 두고 육아에 전념하였다.우리는 카푸치노와 크로와상으로 아침을..
2017.03.07 -
결혼 | 아이
약의 힘이 놀랍다. 언제나 임신을 염두에 두어 무릎 통증에 대한 진통소염제를 억제했는데, 지난 수요일 밤, 20분 동안 같은 자세로 서 있었더니 제대로 걸을 수 없을 만큼 통증이 왔다. 마침 다음 목요일 오전에 대학병원 정기 검진이 있었고 임신도 확실히 아닌지라, 무릎에서 물을 뽑고 비스테로이드 성 소염제 주사를 맞은 후 처방해 주시는 약을 이틀 먹었다. 그래서, 지금 무릎의 상태는 최근 수 개월 간 가장 좋다. 사실 나는 결혼한 지 한 달도 안 되었을 때, 불임클리닉을 찾아갔었다. 결혼 예식을 앞 두고는, 아이를 갖게 될 경우를 대비하여, 먹는 약과 음식을 주의하기 시작한 터였다. 바르는 화장품과 비누, 샴푸의 성분도 꼼꼼히 따졌고, 직장을 그만 둔 후엔 미세먼지 많은 날은 아예 밖에 나가지도 않았다...
2017.0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