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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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lcome Little Miss
구역 식구들 중 곧 딸의 출산을 앞 둔 분이 계셔서, 색연필로 카드를 만들고, 도일리로 웰컴카드를 만들었다. 우리 집에서 구역 모임을 할 때, 깜짝파티를 열어줄 계획이었다. 그 분이 갑자기 못오게 되셔서 파티는 무산되었지만, 웰컴카드는 계속 사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웰컴 리틀 미스 뿐 아니라 미스터로 변용할 수도 있고. Miss에 분홍색을 쓰게되는 것은 나의 잘못된 고정관념일까. 그래도, 핫핑크 물감을 찍어 바를 때엔 짜릿한 카타르시스!
2016.10.06 -
담을 타고 내려오는 인사
가로막힌 담일지라도 이따금 다정해 보일 때가 있다. 친구가 그 순간을 포착한 것 같다. "그냥..." 이라는 인스타그램 문구가 좋아서, 수채화로 그려보았다. 마치 담벼락이 나에게 "안녕? 그냥 한 번 쳐다봤어." 라고 말 거는 것 같다.
2016.10.06 -
카페 | 아침 커피 - Ediya Coffee
아침 여덟시 삼십분. 차가워진 아침 공기를 따뜻하게 위로해주는 저렴한 카페라떼 한 잔. 이른 아침에 홀로 카페를 지키는 젊은 여성은, 주문이나 계산과 상관 없는 나의 눈길에 자신도 모르게 경계의 표정을 지었다. 미안한 마음이 들어도 실은 내가 마음 속으로 그녀를 예쁘고 어리고 사랑스럽다고 여기며 바라보았다는 것을 설명할 길이 없다. 문득 싼 커피를 표방하는 이 카페의 인테리어 하나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의자마다 새겨진 동으로 만든 명패며, 벽돌과 시멘트로 파벽한 벽이며, 나무 테이블이 정갈한데, 아름다움과 현실성 가운데 묘한, 성공적인 줄타기. 게다가, 컵홀더에 15년을 버텼다는 자랑스런 기념 문구 – 바로 건너 편에는 두 배 가격의 다른 유명 상표의 카페가 보인다. 이 가게와 이 사업에 아무 상관 없..
2016.09.30 -
미술이야기 | 반 고흐 Vincent Van Gogh 자화상
암스테르담에 갔으니, 으레 반고흐 미술관에 가야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미술을 전공한 나로선, 사실 그에 대해 너무 많은 책과 사진을 보았으므로 별 기대는 없었다. 아주 오래 되어 이제 아무렇지도 않은 연인을 만나러 가는 통과의례처럼 그렇게 전시실에 들어섰을 때, 처음 마주친 그의 그림은 이 자화상이었고, 나는 충격을 받았다. 분명 큐레이터도 같은 감동을 받았기 때문에, 이 그림을 관객들의 동선 맨 처음에 위치시켰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위의 포토카피는 그 감동을 제대로 전달할 수 없을테니 최대한 찬찬히 묘사해보겠다. 먼저, 그림을 그려본 사람들, 특히 초상화를 그려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사람의 얼굴을 그릴 때 가장 신나는 순간은 눈동자의 광채를 그리는 순간이다. 그러나 고흐는 자신의 눈동자에 빛을 그..
2016.09.27 -
영화 | 밀정 - 김지운 감독
113~114회에서는 병법에 등장하는 밀정의 네 종류를 자세히 설명해준다. 간단히 옮기자면 아래와 같다. 1. 향간 - 적진의 정보를 얻기 위하여 그 지역에서 포섭한 사람. 2. 생간 - 정보를 캐내기 위하여 적진으로 보낸 밀정. 살아 돌아와야만 한다. 3. 사간 - 잘못된 정보를 갖고 적진에서 죽어 교란시키는 사람. 이 사람은 돌아오면 안 되고, 죽어야 한다. 밀정 본인이 자신의 역할을 착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 즉, 아군에게 배신당한 것을 모르고 자신이 의도적으로 사지에 보내졌다는 것도 모르는 채, 잘못 알고 있는 정보를 흘리며 죽을 수 있다. 4. 반간 - 이중간첩. 그 존재의 진의 여부는 아군에서도 극히 일부분만 확신하고 소통할 수 있는 존재이다. 성경에는 네 가지 종류의 스파이들이 모두 등장한다..
2016.09.20 -
나의 사랑하는 책 | 한강의 "희랍어시간"
그 후 초등학교에 다니면서부터 그녀는 일기장 뒤쪽에 단어들을 적기 시작했다. 목적도, 맥락도 없이 그저 인상 깊다고 느낀 낱말들이었는데, 그중 그녀가 가장 아꼈던 것은 ‘숲’이었다. 옛날의 탑을 닮은 조형적인 글자였다. ‘ㅍ’은 기단, ‘ㅜ’는 탑신, ‘ㅅ’은 탑의 상단, ㅅ-ㅜ-ㅍ 이라고 발음할 때 먼저 입술이 오므라들고, 그 다음으로 바람이 천천히, 조심스럽게 새어나오는 느낌을 그녀는 좋아했다. 그리고는 닫히는 입술. 침묵으로 완성되는 말. 발음과 뜻, 형상이 모두 정적에 둘러싸인 그 단어에 이끌려 그녀는 썼다. 숲. 숲. 한강 작가의 ‘희랍어시간’을 읽으며, 뉴욕 매니스음대에서 성악 과정을 밟던, 친한 언니가 해 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언니는 나의 발음을 분석하셨다. “너는 성대를 완전히 닫아서 소..
2016.09.13 -
가을 편지
추석은 평소 감사한 분들께 감사 인사를 전할 수 있어서 참 좋은 명절이다. 단풍을 줏어 카드를 만들었다. 낙엽 한 장 한 장이 너무 예뻐서, 그대로 따라 그리는 것 외 다른 장식을 하지 못했다. 수채화에 와트만지. 봉투도 낙엽으로 봉한다. 다른 수식어를 찾지 못하겠다. 소명을 다 하고, 이제 소멸하는 낙엽 한 장에도 아름다움을 부여하시는 나의 주. 나의 노년과 사랑하는 사람들의 노년 역시 그렇게 존귀와 품위 더해 주시기를 기도한다.
2016.09.13 -
영화 | 내 곁에 있어줘 Be With Me - 에릭 쿠 Eric Khoo
(1) 영화 "내 곁에 있어줘"는 싱가폴의 감독 에릭쿠가 만든 사랑에 대한 영화입니다. 세 개의 픽션과 한 개의 논픽션을 교차하여 만든 재미있는 구성이지요. 아래 네 개의 에피소드 중에서 과연 어느 것이 실화일까요? 1. 한 수위가 그가 일하던 고급 아파트에 사는 상류층 여인을 짝사랑합니다. 해고되던 날 어렵게 쓴 연애편지를 전달하러 가지만, 과연 그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2. 재키는 사만사와 채팅으로 만났어요. 둘은 친구 이상의 동성애적인 사랑을 품게 되었지요. 그러나 사만사가 남자친구를 사귀고 재키와의 연락을 두절하자 재키는 자살을 결심합니다. 3. 윌리엄은 사회복지사 입니다. 작은 가게를 운영하는 그의 아버지는 언제나 맛있게 요리한 음식들을 그의 어머니의 밥그릇에 담아줍니다. 그러나 그 ..
2016.09.08 -
밤산책
날씨가 무덥다. 입추 지나면, 광복절 지나면, 한 풀 꺾인다고 엄마가 말씀하셨는데, 정말로 지구 위의 얼음들은 녹고 있을까. 저혈압에 포도주를 써보라 하여, 한 모금 물었더니 걸을 힘이 났다. 아파트 없이 하늘을 찍어보았다. 저 빛나는 것은 별일까,인공위성이겠지. 방금 뺨에 닿은 물방울은 소낙비의 시작일까, 실외기에 맺혔던 H2O겠지. 가로등이 보름달처럼 아름다웠다. 나의 머리 위를 가로질러 날라가던 비행기의 깜빡거림도 내 곁을 스쳐 지나가던 블레이드의 형광 빛줄기도 낮의 더위를 피해 놀러 나온 아이들의 소란함 속에서 내 한 발자국 앞을 조심스레 앞서 가던 자동차의 붉은 브레이크등도. 살갗이 간지럽다. 모기도 없이 잘 관리된 아파트 단지에서 산책을 마치면, 항히스타민을 먹어야겠다. 몸 밖의 것들을 대함에..
2016.08.18 -
livluvlun | 책갈피
"디자인과 시를 함께 만들고 싶어." 친구는 눈을 반짝였다. 소중히 들고 온 살구빛 하드커버는 '무한화서' - 모서리가 낡은 책은 한 눈에 아껴서 간직해온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쑥 색 마감에 오목하게 새겨진 '문학과 지성사'라는 글귀는 얼마나 예쁘던지. 이 색깔들을 선택하셨던 디자이너는 도대체 얼마나 고운 분일까. 털이 송송 나 있어서 마치 강아지 같던 잎사귀는 말린 그대로 책갈피가 되었다.
2016.0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