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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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정원 | 미니 김장
결국, 엄마가 강화도에 가신게 문제였다. 평화롭던 수요일 오후, 엄마로부터 전화벨이 울렸다. 구역식구들과 강화도 풍물시장에 다녀오신다길래, 순무김치를 부탁드렸는데, 엄마는 나보고 수레를 갖고 지하주차장에 내려오라는 것이다. 도대체 얼마나 사셨을까. 호기심으로 내려가보니, 정말 수레가 필요하다. "한 상자에 만원인데 안 살 수가 없었어." 고구마, 무, 파, 무청, 콩, 고추 순무김치 등등 싱싱한 야채들을 한 아름 실어 오셨다. 졸지에 미니 김장을 하게됐다. 그러나 파를 다듬으시는 엄마를 뒤로하고 나는 선약되어있던 장소로 떠나야만했다. 그 날 엄마는 자정까지 야채들을 다듬으셨다고 한다. 그래서 아침 일찍 엄마네 집으로 갔을 때, 거실은 김장모드였다: 바닥은 신문지로 무장되어있었고, 집의 모든 대야들은 출동..
2016.11.07 -
결혼 | 부동산
나는 우리 집을 매우 사랑한다.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남편과 사귈 때, 나를 집 앞까지 데려다주던 그는 돌아가기 전 놀이터에서 그네를 밀어주면서 나의 등 뒤에 부끄러운 듯 이렇게 말했었다. "모아둔 돈은 OOO에요. 연금보험을 깨뜨리면 OOO을 더할 수 있어요. 그래도 집을 마련하기에는 턱 없이 부족하지요." 당시 나는 결혼을 생각하고있지 않았었다. 그러나 그 돈은 회사의 부도 위기와 급여 연체에 시달리던 나에게는 무척 큰 액수였고, 눈물이 핑 돌았다 - 이 남자는 내가 무엇이관대 자신의 모든 것을 주려고 할까. 그리고 결혼을 결심한 뒤, 그가 여느 때처럼 집 앞까지 데려다주던 어느 날 저녁 나는 놀이터에서 한 번 더 눈물을 터뜨렸었다. 회사와 집의 사정 상 혼수를 준비하기가 너무 ..
2016.11.04 -
엄마의 정원 | 도라지
아빠가 5년 전 할머니 산소에 성묘가셔서 캐오신 야생 도라지가 엄마의 11층 아파트 창가에서도 계속 그 황홀한 보라빛 꽃을 피우고 있다. 밖으로 나가고 싶어하는 개구쟁이 꼬마가 코를 창에 박고 바깥 세상을 동경하듯이, 꽃도 그 여린 얼굴을 유리창에 박고있다. 창 밖은 오직 외곽순환도로이고 자동차들이고 미세먼지일 뿐인데도. 그녀가 살던 그 깊은 숲 속, 비밀스런 햇살과 바람이 찾아오던 그 곳의 흙을 그리워하듯이.
2016.11.03 -
엄마의 정원 | 고구마 2
엄마가 그저 물에 담가두셨을 뿐인데, 엄마가 하신 일은 그것밖에 없는 것 같은데, 고구마가 식탁을 점령해버렸다. 모두가 잠든 밤에 토토로가 몰래 와서 고구마에게 마법을 건 것일까. 자신이 라푼젤인듯 그 잎사귀를 치렁치렁 늘어뜨리고 마법같은 생명력을 뽐내는 중이다. 엄마의 손길과 눈길 아래에서는 고구마 한 알도 행복해지나보다.
2016.11.02 -
나의 사랑하는 책 | 숨결이 바람될 때
남편의 중성지방 수치가 1480, LDL은 450, HDL은 20이란 검사결과를 받았을 때, 이 책이 읽고싶어졌다. "어떻게 하면 건강을 되돌릴 수 있을까?" 남편은 해맑은 얼굴로 건강한 듯 회사에 다니고 운동을 하지만, 이 수치는 사실 오늘 당장 그가 심장발작을 일으킨다거나 뇌졸증으로 쓰러진다해도 이상하지 않은 팩트이다. 화창한 가을 햇살 아래, 나는 그가 가져다준 보험증서들을 베개삼아 편안하게 소파에 누워서 이 책을 한 달음에 읽었다. 책의 저자인 폴 칼라니티는 레지던트 마지막 해 자신의 폐암을 발견하고, 투병과 함께 이 책을 집필했으며, 완성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았다고 한다. 죽음 이후, 그의 책은 딸과 함께 세상에 남은 아내 루시가 마무리하여 출간했다. 책의 제목은 아래의 시에서 따온 것이다. 당..
2016.10.27 -
동네에 좋은 빵집이 생겼다 - 블랑슈
동네에 작은 빵집이 문을 열었다. 한 달을 두어도 상하지 않는, 참으로 기이한 대자본의 제과점들 사이에서 오롯이 "블랑슈" 라는 자기 이름를 걸고, 하얗고 순수하다는 뜻이란 설명까지 덧붙인 그 간판 아래. 반갑게 가게에 들어섰을 때 마침 내가 하고픈 말을 하고있는 아기아빠를 보았다, "(점원에게 활짝 웃으며) 우리 동네에 좋은 빵집이 생기길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요!" 왠지 천진해보였던 그 젊은 아빠 곁에서 서너살 되어보이는 어린 아들은 먹어보라고 잘라둔 빵조각들로 배를 채우느라 정신 없었다. 어른인 나 역시 얌전하지만 신속하게 그 샘플들로 허기를 달래었는데, 모든 빵들이 건강하고 맛있었다. 파운드 케이크는 계란을 많이 써서 묵직했고, 초콜렛 빵도 좋은 카카오의 향기가 났다. 재료를 아끼지 않아 풍성한 ..
2016.10.26 -
청귤차
바쁜 직장생활, 그것도 대기업 사장 비서실에 근무하면서 언제 청귤로 손수 청을 담갔을까. 부지런한 친구의 사랑이 향기롭다. 달콤새콤하게 우러난 차를 마신 뒤에는 씹어먹을 수 있도록 얇게 저민 과육도 정성스럽다.
2016.10.26 -
엄마의 정원 | 고구마
엄마가 싹 튼 고구마를 물에 담가두신 지 며칠 되지 않아 사진처럼 무성해졌다. 엄마는 무엇이든 이렇게 키워내셨다: 우리 집이 아무리 어려운 시절을 지날 때도 엄마의 식탁은 언제나 마법처럼 풍요롭고 건강했으며 (그래서 사위를 단숨에 12kg이나 찌워내셨다), 엄마의 화단은 꽃들이 지지 않았고, 엄마 곁에는 늘 선물을 주고 받는 친구들이 끊이지 않는다. 심지어 생활비가 끊겨도 엄마의 지갑은 하나님께서 채워주셨다. 가끔 엄마는 아빠의 사업이 어려워 억울한 채근을 당하셨는데, 엄마의 눈물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다른 어느 때보다 신속했던 것 같다. 그래서 엄마에게는 조용하고 겸손하지만 확실한 "삶"에 대한 자신감과 "죽음"에 대한 자신감이 있다. 그 분의 딸인 나로서는 엄청난 복이다.
2016.10.25 -
Walk with Him | 다시 시작할 때 주시는 위로와 용기 (에스라 5:1~2)
"Ezra Reads the Law to the People," one of Gustave Doré's illustrations for La Grande Bible de Tours 기도 모임 지체들 중 한 명이 에스라를 읽으면서 묵상한 내용을 공유했는데,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언제나 실패를 거듭하는 나에게도 위로와 용기가 되어서 '본인의 허락 없이 :)' 블로그에 공유한다. 특별히, 오늘의 묵상은 에스라 5장을 시작하는 단 두 구절일 뿐인데도, 학개와 스가랴를 아울러 넓고 깊게 내려간다. 애초, 그가 이 성경을 통해 던진 닻은 사람을 향하지 않고 신을 향했었으며, 아래의 달콤한 결실을 보면, 단단하게 잠겨있던 그 두 구절들을 힘겹게 벌려 내민 그의 손을, 주께서 맞잡아주셨던 것 같다. 혼자 읽기 아까운 ..
2016.10.22 -
초가을에 남아있는 작은 여름들
이제 나뭇잎들과 작별을 고할 때가 다가오고 있는데도 청초한 초록색이 참 예쁘다. 붓으로 아무렇게나 피어있는 잎사귀들을 그리는 일은 정말 즐거운 일이다. 오늘처럼 하늘이 높고 햇살이 눈부신 날에는 더더욱. 그래서 나는 잎들이 붉게 물들어 사라지기 전, 두꺼운 종이에 그 모습을 남겨두고 겨울 내내 기억할 참이다. 받아랏~ 햇살! 정말 광합성하여 자라날 지도.. :-) 심지어 아파트 단지 화단에는 장미꽃도 피어있다. 슈퍼마켓에 다녀오는 길, 마치 어린왕자의 장미꽃 같은 저 붉은 색이 환하게 인사하여 사진으로 남기지 않을 수 없었다. 시월인데, 초가을에 남아있는 작은 여름도 사랑스럽다.
2016.10.06